일상 이야기

눈 내리는 남한산성

Keaton Kim 2017. 12. 25. 18:38

 

 

 

# 69. 눈 내리는 남한산성

  

 

 

임금은 젖은 땅에 무릎을 꿇었다. 임금이 이마로 땅을 찧었다. 구부린 임금의 저고리위로 등뼈가 드러났다. 비가 등뼈를 적셨다. 임금의 어깨가 흔들렸고, 임금은 오래 울었다. 막히고 갇혔다가 오래 터져나오는 울음이었다. 눈물이 흘러서 빗물에 섞였다. 임금은 깊이 젖었다. 바람이 불어서 젖은 옷이 몸에 감겼다.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 김훈의 남한산성 중에서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것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에, 막내 아이와 함께 남한산성엘 간다니, 내가 생각해도 좀 너무 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아니면 이 겨울을 넘겨야 겨우 갈 수 있을지 말지라고 생각했고, 아이에게 말하니 막내도 흔쾌히 가겠다고 했다. 30분을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아, 잠깐 포기할까라고 생각이 들었으나,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택시를 탔다. 남한산성으로 가자고 했다. 기사가 무슨 일로 남한산성엘 가느냐고 물었다. 그냥 남한산성을 보고 싶어서 간다고 대답했다. 올라가는 길에 비는 눈으로 바뀌었다. 기사가 물은 의도를 알 것 같다.

 

 

 

 

 

 

 

 

 

 

가장 먼저 만난 북문의 모습과 바깥쪽의 자태. 바깥쪽의 내려가는 길은 낯이 익다. 강이가 "아, 영화에서 본 길이에요." 한다. 그 장면이 기억나는지 신이 났다.

 

 

 

 

 

 

 

 

 

 

서문으로 올라가는 길은 험했다. 눈발도 거칠어졌고 바람도 매서웠다. 이런, 인조의 상황을 제대로 느끼겠는 걸! 뒤따라 오는 아이가 "아빠, 눈 맛 없어요." 한다. 남쪽에서 자란 아이는 눈이 신기하다. 고개를 뒤로 하고 내리는 눈을 받아 먹고는 하는 말이다. 아이의 천친함에 나도 웃는다.

 

 

 

 

 

 

 

 

 

 

 

 

남한산성에 간다면 반드시 서문을 보리라 마음 먹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강화도로 피난가던 인조가 청의 군대를 피해 12월 14일에 들어와서 1637년 1월 30일까지 47일간의 대치와 굴육 끝에 아들 소현세자와 항복하러 삼전도(지금의 잠실)로 나간 바로 그 문이다. 문은 좁고 나가는 길은 가팔랐다. 인조와 소현세자와 최명길이 걸었던 길을 나도 눈바람을 맞으며 걸어보았다. 내려가다 다시 쳐다본 서문은 왠지 처량했다.

 

 

 

 

 

 

 

 

 

 

그리고 수어장대. 100년 전의 수어장대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낡은 사진 속에서 수어장대는 늠름하고 아름다웠다. 눈보라 속에서 스윽 하고 나타난 수어장대는 역시나 기품이 있었다. 언뜻 보아도 충분히 매력적인 건축물이다. 내가 여태 보아온 우리 건축중에 손 꼽을 만한 아름다움이다.

 

 

 

 

 

 

 

 

수어장대 1층 마루에 앉아 너른 마당에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쳐다본다. 아이가 안보여서 불러보니 옆 마당에서 눈사람을 만들고 있다. 장갑도 없이. 손 시릴텐데. 그건 아빠 걱정이고 난 무지 신나요! 라는 표정으로 놀고 있다. 눈사람과 함께 포즈를 잡는다.

 

 

 

 

 

 

남한산성의 4대문 중에서 가장 크고 웅장하다는 남문이다. 그러니까 산성의 정문이다. 인조가 피난왔을 때 이 문으로 들어왔다. 잘생긴 문이라 좀 오래 보려고 했는데, 눈발이 점점 거세어져서 앞을 잘 볼 수도 없을 정도가 되었다. 눈발 속에서도 남문은 위엄이 있었다.

 

 

 

보통은 1시간이 걸린다고 했던 둘레길을 눈바람을 맞으며 두시간을 헤매였다. 살아서 죽고, 죽어서 산다는 김상헌과 최명길의 말들이 귓가에 웅얼거린다. 눈발은 거세어지고 날은 저물고 있다. 춥고 배고프고 다리도 아프다. 내려가는 길이 막막하다. 다행히 막내는 지친 기색을 전혀 안보인다. 어떻게 내려갈까 열심히 궁리하고 있는데, 마침 버스가 왔다. 산에서 내려오니 눈도 그치고 완전 다른 세상이었다.

 

 

 

비록 행궁도 보기 못하고 만해 선생의 기념관에도 가보지 못했지만, 이번 남한산성의 짧은 여행은 어떤 추억보다 기억에 오래 남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