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표 문화유산 세계문화유산 10점
1960년 이집트가 아스완 하이댐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이 댐이 완공되면 누비아 유적, 특히 아부심벨신전이 완전히 물에 잠기게 됩니다. 위의 사진입니다. 이집트, 난 유적 그런거 몰라. 저런 거 우리나라 온 천지에 널렸어. 전기가 더 중요해!!! 유네스코 난리가 납니다. 세계 각국에 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합니다. 뜻 있는 60개국이 응원해서 이 유적을 제대로 발굴하고, 옮겨서 지금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세계적인 문화유산, 자연유산을 보존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1972년 마침내 세계의 문화유산 및 자연유산에 대한 보호조약이 만장일치로 통과되고 1975년 처음으로 미국의 엘로우스톤 국립공원, 에콰도르의 갈라파고스 제도 등 12개의 자연, 문화유산이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됩니다. 자매품으로 세계기록유산, 인류무형문화유산등이 있습니다.
찬란한 로마문명의 발상지 이탈리아가 제일 많은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49점). 중국(45점), 스페인(44점)이 그 뒤를 따릅니다. 40개 이상 보유국이 이 세나라구요, 30개 이상은 프랑스, 독일, 멕시코, 인도구요, 20개 이상은 영국, 러시아, 미국이 있습니다. 이 열나라 중 8개 나라가 세계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나라 10위 안에 듭니다. 상관관계가 대단히 크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세계문화유산이나 자연유산으로 지정이 되어도 수난받는 유산들이 있습니다. 아프카니스탄의 바이안 석불은 이슬람 문화권에서 보기 힘든 불교 유물이었으나 탈레반이 개박살을 냈으며, 이런 개쉐이들을 봤나... 이라크 전쟁과 시리아 내전으로도 많은 유산들이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전쟁을 해도 최소한의 양심.... 이런 거 요구하기엔 무린가???
우리나라는 세계문화유산 10점이 있고 세계자연유산 1점이 있습니다. 북한에는 평앙, 남포 고구려 고분군과 개성역사유적지구 등 2점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자....... 그럼 우리나라의 대표 문화유산인 세계문화유산엔 어떤 것이 있는지 한번 살펴 보겠습니다.
1. 불국 정토를 갈망하는 예술혼의 극치 - 석굴암 · 불국사 (1995)
석굴암은 신라시대 전성기의 최고 걸작으로 그 조영계획에 있어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이 총체적으로 실현된 유산이며, 불국사는 불교교리가 사찰 건축물을 통해 잘 형상화된 대표적인 사례로 아시아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건축미를 지니고 있다. - 문화재청
어느 날 문득, 석굴암의 그 토함산에서 해 뜨는 걸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잠을 설치고 아내와 눈도 못뜨는 아이들을 강제로 차에다 싣고 설레임으로 어둠을 헤치고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토함산에 도착하려면 한참 남았는데 날이 밝아오더니, 해가 떠 버리고 말았습니다. 에잉.... 이게 머야.... 마눌은 역시나 한마디 하십니다. "니가 하는 기 다 그렇지머......"
그래서 불국사로 바로 갑니다. 근데 너무 일찍이어서 문을 안 열었습니다. 문 앞에서 기다립니다. 시간이 되어 관리아저씨가 문을 열어줍니다. 가 보셨습니까? 아침에 깨끗이 비질이 되어 아무도 밟지 않은 불국사의 마당을? 그 마당에 우뚝 서 있는 두개의 탑의 놀랄만한 비례를? 아무도 없는 고요속에서 내뿜는 천년된 절의 정기를? 저는 그 때의 감동을 아직도 선연히 기억합니다. 절이 정기를 뿜는다는 말을 정말 실감했습니다. 수학여행 온 애들과 복작복작 하면서 보는 것도 재미지만, 아침 첫 참배객으로 불국사에 가면 천년고찰의 고요한 숨소리를 제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동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교미술품이 불리는 석굴암. 통일신라가 가장 융성하던 시절, 김대성이 751년에 시작해서 20여년 동안의 고행끝에 완성되었다.
어릴 적에 왜 저기 불상 이마에 보석이 박혀 있었는데 일본넘들이 떼어가서 지금은 없지만.... 여하간 해가 떠 오르면 제일 먼저 저 보석으로 들어가서, 그 빛이 반사되어 레이저 광선처럼 일본까지 간다.... 머 그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머 아직 초딩들은 그렇다고 믿는다능.....ㅋㅋ. 사진에 보면 천정의 제일 꼭대기 덮개도 깨져 있는데, 김대성이 이걸 다 준비했는데 실수로 깨뜨려버리고 울고 있는데 부처님이 내려와서 다시 붙여줬다는.... 머 그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석굴암이 처음 발견될 당시의 사진
일제에 의해 훼손되기 전 석굴암 모습
석굴암 천정에 구멍이 뚫려 비가 샜습니다. 일제는 보수공사를 시작합니다. 구멍만 막으면 되는데 지붕전체를 다 들어냅니다. 대규모 해체공사를 합니다. 이 와중에 석굴암 내부에 지하수도 막아버립니다. 그리곤 그 시절 최첨단 공법인 콘크리트로 처발라서 마무리합니다. 이때부터 내부벽과 본존불에 결로가 생기고 이끼가 끼기 시작합니다. 박정희 시절 다시 한번 보수공사를 합니다. 콘크리트 더 처바릅니다. 이때부터 석굴암은 아예 밀폐시킵니다. 못 들어갑니다. 제습기를 갖다놓습니다.
1913년 해체 수리하는 모습. 본존불에다 칼을 채워 놓은 같네. 저 아저씨들 머하는 아저씨들이지??
뭔가 가둬 놓은 것 같아 보기가 좀..... 근데 저 시절에 저렇게까지?? 잘 모르겠으면 그냥 놔 두는게 제일 좋다. 가장 최소한의 조치만 하고. 달나라에 여행가는 세상이지만 아직 천이백여년전의 그 기술을 완전히 파악 못한다. 완전하게 복원할 수 있다는 기술과 공감대가 형성되고 나서 시작해도 늦지 않다.
인왕상의 대표선수. 조탑동 전탑이나 분황사 모전석탑에 있는 인왕상도 다 저렇게 생겼다.
원래의 구조는 저 안으로 들어가서 본존불에 참배하고 본존불 주위에 있는 제자상과 관음상을 찬찬히 둘러 보는 것이 만든이의 의도였을텐데.... 지금은 볼 수없다. 죽기전에는 볼 수 있겠지.....
근엄하기도 하면서 뭔가 좀 섹시하다는 느낌도 준다.
통일신라의 예술문화가 가장 꽃피울 시기에 완공한 불교미술의 극치라 불리우는 석굴암입니다. 예술적 감각 뿐만 아니라 건축, 수학, 기하 같은 과학 기술적인 면으로도 탁월해서 1995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예전엔 중국이나 인도의 그 거대 석굴의 부처님에 비해 왜소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서야 그 아름다움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동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교미술품이라 불리는 이유를 어렴풋하게 나마 알겠습니다.
응??? 아줌마...... 그기 왜 들어가셨어요??? 얼른 나와요!! 혼나요!!! 근데, 나도 거기 다 볼 수 있게 좀 해줘요.... 시간 걸려도 좋으니까.... 기다릴 수 있어요. 천년 넘게 잘 견뎌온 석굴암이 지금에 와서 수난의 시대를 보내고 있다. 언젠가는 김대성이 만든 그 원형 그대로의 석굴암을 보게 되기를 기대한다.
불국 정토가 바로 여기다. 그런 신념으로 김대성이 지었을 거다.
이 청운교와 백운교를 올라가서 자하문을 통과하면 불국 정토로 들어간다.
신라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557년) 그 다음해 불국사를 짓습니다. 통일신라가 정점에 달했을 때 김대성이 크게 중수하면서 청운교와 백운교, 연화교와 칠보교, 석가탑, 다보탑을 만들고 석굴암도 만듭니다. 이거 다 국보입니다. 김대성은 천재적인 수학자이자, 건축가이며 조형예술가입니다. 황룡사가 규모로서 불교의 융성함을 과시하였다면, 불국사는 치밀한 구성의 완성도와 아름다움으로 부처님의 나라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홍준 선생은 불국사의 아름다움 중 으뜸은 바로 석축이라고 했다. 아랫단은 막쌓아 자연미가 넘치고 윗단은 다듬은 돌로 인공미가 나게 쌓았다. 저 돌들이야 말로 천년의 무게를 버티고 있다.
자연석을 평평하게 하여 장대석을 올린 게 아니라 오히려 장대석을 자연석에 맞추어 깎은 그렝이 공법. 이렇게 천년을 견디고 또 다른 천년을 견디어 낼거다.
한때는 거의 방치상태로 있었던 시절의 불국사이다. 일제가 한번 복원, 보수하고 1970년부터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박통이 공구리로 때려부어 보수하라고 하는 걸 한림대 김정기 교수라는 양반이 차라리 나를 공구리 치시오~~ 하면서 반대했다는 전설이.....
소설가 현진건이 다보탑을 예쁘고 화려하게 치장한 미인 즉 성장미인(盛裝美人)으로, 석가탑을 기초화장에 수수한 옷을 입은 미인 즉 담장미인(淡粧美人)으로 비유했다. 균형과 세련..... 보면 볼 수록 폼나는 탑이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슬픈 전설이 있는, 그래서 그림자가 없는 무영탑으로 불리기도 한다. 나는 갈 때마다 석가탑의 그림자를 꼭 확인한다. ㅎㅎ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나온 곳도 여기다. 도굴꾼 잡다가 발견했단다.
석탑의 화려함의 극치 다보탑이다. 본래 네개가 있어야한는 저 앙증맞은 사자상이 하나밖에 안남았다. 하나는 대영박물관에 있고 나머지 둘은 일본 어떤 넘들의 다락방에 있을 거다. 근데 대영박물관에 있는 거는 우리끼다고 돌라카먼 안주나? 안준다 카모 사가 오든가, 이도저도 안되면 그 머시냐 김윤석이하고 전지현이하고 이정재랑 김수현이랑 팀 꾸려서 영국으로 보내던가....
불국사의 배치도. 김대성이 왜 천재적인 수학자인지 알 수 있다.
강당인 무설전의 기와..... 먼가 아련해온다.
석굴암과 불국사. 너무나 노출되어 있어 어쩌면 가볍게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저도 그 새벽의 불국사가 아니었으면 그냥 남들 다가는, 수학여행이나 가는 곳으로 아마도 그렇게 생각했겠지요. 석굴암과 불국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속세에, 비록 한정된 공간이지만 부처님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지와 그 예술혼이 집약된 곳입니다. 자세히 들여다 볼 수록 아름답고 신라인들의 부처님에 대한 간절함을 발견 할 수 있는 우리의 대표 문화유산입니다.
2. 위대한 유산을 보존하는 첨단 시설 건축물 - 해인사 장경판전 (1995)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 그리고 고도로 정교한 인쇄술의 극치를 엿볼 수 있는 세계 불교경전 중 가장 중요하고 완벽한 경전이며, 장경판전은 대장경의 부식을 방지하고 온전한 보관을 위해 15세기경에 건축된 건축물로 자연환경을 최대한 이용한 보존과학 소산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 문화재청
고려시대, 거란족들이 마구 침입합니다. 네,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에 나오는 그 거란족입니다. 왕이 도망댕깁니다. 힘듦니다. 부처님한테 빕니다. 절마들 쫌 안쳐들오게 해주이소... 그래서 목판에 불교경전을 팝니다. 무려 76년동안. 근데 그 후 몽골이 와서 단번에 불태워 버립니다. 이런~~~ 다시 준비합니다. 이거 만들라고 대장도감이라는 기구도 만듭니다. 나무를 준비하고 일년간 눕혀두고 다시 합판으로 만들어 소금물에 삶고.... 이제 파기 시작합니다. 글자체를 똑같이 하기 위해 일년간 훈련을 시킵니다. 졸라 팝니다. 몽골이 쳐들어와도 계속 팝니다. 한자 파고 절하고, 또 한자 파고 절하고..... 그렇게 15년을 파서 1251년 대장경이 완성됩니다.
해인사 대장경판, 속칭 팔만대장경. 불경을 인쇄하기 위해 만든 목판. 글자수는 644(경판 한장당 글자수) × 81,258(경판 수) ≒ 자그마치 52,330,152자. 뜨헉..... 이 엄청난 숫자는 조선 500년 역사를 정리한 조선왕조 실록의 49,646,667자를 웃도는 수치입니다.
팔만대장경이 있는 가야산 해인사 정경
이 대장경은 원래 강화도에서 만들어져서 강화도에 보관되었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고 가까이 두고 보고 싶어서 서울로 옮기라고 명합니다. 팔만명이 대장경판 하나씩 머리에 이고 서울로 옵니다. 왜구가 자꾸 쳐들오 옵니다. 태조 불안합니다. 가야산속 해인사로 다시 옮깁니다. 보관상태가 썩 양호하지 못합니다. 세조 때 대장경을 보관할 건물을 짓습니다. 천년동안 대장경이 안 상하고 보관할 수 있게 만들라..... 그래서 장경판전이 만들어집니다.
건물을 간결한 방식으로 처리하여 판전으로서 필요로 하는 기능만을 충족시켰을 뿐 장식적 의장을 하지 않았으며, 전·후면 창호의 위치와 크기가 서로 다르다. 통풍의 원활, 방습의 효과, 실내 적정 온도의 유지, 판가의 진열 장치 등이 매우 과학적이며, 합리적으로 되어 있는 점은 대장경판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다 - 문화재청
장경판전은 15칸짜리 길쭉한 건물 2개가 마주보고 있고 두칸짜리 작은 건물이 2채 더 있습니다. 남쪽에 있는 긴 건물을 수다라장이라 부르고 북측 건물은 법보전이라 불립니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오로지 대장경판을 잘 보관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만들어졌는데요, 아주 숨은 하이테크들이 많습니다. 지금의 기술로도 못 따라 갑니다. 대단한 선조들입니다. 이용재 선생의 말을 잠깐 들어보겠습니다.
수다라장과 법보전 두 건물의 각 벽면에는 위아래로 두 개의 창이 이중으로 나 있다. 아래창과 위창의 크기는 서로 다르고. 건물의 앞면 창은 위가 작고 아래가 크며, 뒷면 창은 아래가 작고 위가 크다. 큰 창을 통해 천천히 건물 안으로 흘러들어온 공기는 골고루 퍼진 후에 작은 창으로 빠르게 나간다. 과학. 소금, 숯, 횟가루, 모래를 차례로 놓은 판전 내부 흙바닥은 습기가 많을 때는 머금고, 습기가 없을 때는 내보내는 자동습도조절기. 동서 사간판전을 두어 안마당을 만든다. 양지바르고 바람 잘 통하는 명당. - 이용재 선생의 홈페이지 인문학적인 집짓기 중에서
위기의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세종 때 일본넘들이 이거 달라고 졸라댔었댑니다. 안된다고 해도 하도 졸라대싸니까 세종이 귀찮아서 그럼 주까? 라고 했는데 대신들이 아주 반대를 해서 남았고, 한국전쟁 땐 해인사로 숨어 들어온 빨치산 소탕할라고 이승만이 야! 공중 폭격해서 절이고 빨갱넘이고 그냥 다 쓸어버려!!! 했는데 조종사인 김영환이란 분이 차마 팔만대장경때문에 폭격을 못했답니다. 뿔따구난 이승만이 명령 불복종으로 사형을 시킬라고 했는데 공군참모총장이 말려서 겨우 무마되었다고 합니다. 이 때 정말 다 쓸어버렸으면 진짜....이승만.... 지금도 욕 무지 처드시고 계시지만..... 아휴.... 아뭏튼, 이 공로를 뒤늦게 인정해서 2010년 김영환 장군에게 나라에서 훈장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 분, 선비십니다. 존경합니다.
예쁜 우리 딸...... 예전에 해인사 갔을 때, 이거 합성 아니다....ㅋㅋㅋ 해인사에 가면 이렇게 사진 찍어라고 만들어 놓았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국보이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팔만대장경은, 물론 국보이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난중일기, 직지심체요절, 동의보감, 조선왕조의궤, 승정원일기, 일성록,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 새마을운동 기록물 아니 이런 것까지???? 등 11점이 현재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3. 동양의 파르테논 - 종묘 (1995)
종묘는 제왕을 기리는 유교사당의 표본으로서 16세기 이래로 원형이 보존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독특한 건축양식을 지닌 의례공간이다. 종묘에서는 의례와 음악과 무용이 잘 조화된 전통의식과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 문화재청
요즘 드리마 정도전이 한창 인기리에 반영되고 있습니다. 머 저는 아직 못봤습니다만.... 제가 알고 있는 정도전은 지성과 의지력을 겸비한 혁명적 사상가, 그리고 말년에는 줄을 잘 못 선죄로 칼잡이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는 머 그 정도의 인물인데요.... 좀 찾아보니 아주 좌파입니다. 그 시기에 토지개혁과 무상분배를 주장했을 정도이니까요. 여하간 정도전은 개혁가이었으며 무엇보다 한양의 도시계획을 주도한 건축가입니다. 경복궁도 이 양반 작품이구요, 여기 이 종묘도 정도전의 작품입니다.
이분..... 아주 떴습니다.....ㅋㅋㅋ
종묘는 왕의 사당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왕에게 제사 모시는 곳입니다. '전하~~ 종묘사직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의 그 종묘이고, '신주 단지 모시듯'의 그 신주가 모셔져 있습니다. 원래 유교라는 것이 중국에서 건너오고 그래서 왕에게 제사를 모시는 풍습도 당연하게 중국에서 유래되었지만, 지금의 중국은 마오에 의해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었습니다. 물론 공자의 그 유교도 타파해야 될 구습으로 여겨졌구요. 그래서 중국에서 왕에게 제사를 지내던 풍습도 다 없어지고 그 공간인 자금성 앞의 태묘는 노동인민문화궁으로 바뀌어 완전히 유명무실해졌습니다. 공자의 나라인 우리나라가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데요.... 장하다고 해야 할지 어떨지......
종묘의 배치도. 조선 왕들의 신위를 모시는 정전과 영녕전 뿐 아니라 고려 공민왕의 신당, 공신들의 사당인 공신당,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향에 나갈 제관들이 대기하던 향대청, 제례음식을 준비는 종묘의 부엌 전사청, 종묘제례시에 음악을 연주하던 악공들이 연습하며 대기하던 악공청 등이 있다.
종묘는 원래 창경궁과 연결되어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경성의 교통을 원활히 한다는 미명 아래 창경궁과 종묘를 가르는 도로를 개설했다. 순종이 그것만큼은 안된다며 결사반대해 총독부도 어쩌지 못하다가 1926년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바로 공사에 들어가 완성시켜버렸다.
조선 25명의 왕의 위패가 정전과 영녕전에 나뉘어 모셔져 있다. 군으로 전락한 연산군과 광해군의 위패는 없다. 역시나 까불면 안된다.
정도전이 처음 설계하고 만든 종묘의 정전은 왕이 죽고 모셔야 될 위패가 많아짐에 따라 계속 지어집니다. 정전으로 모자라 영녕전도 짓습니다. 정전은 왕이 죽을 때마다 한칸씩 늘어납니다. 계속 지어집니다. 무려 150여년간이나.... 그렇게 해서 완성됩니다. 임진왜란이 나자 선조는 위패만 챙겨 도망갑니다. 도망갔다가 다시 오니까 경복궁도 불타고 종묘도 불탔습니다. 그러면, 종묘는 왜구가 불태웠을까요? 아니면 왕만 도망가서 화난 우리 백성이 불태웠을까요???? 정답은 상상에 맡깁니다...ㅎㅎㅎ
1608년 종묘 중건. 가로 109미터 세로 69미터의 월대. 비어있으면서도 채워진 공간. 월대에는 거친 박석만이 아무렇게나 깔려 있습니다. 그 위에 배흘림 기둥에다 박공지붕만 얹었습니다. 아무런 장식도 치장도 없는, 그래서 오히려 더 경건한 공간으로 만듭니다. 101미터 19칸의 정전에는 왕의 신주 19위와 왕후의 신주 30위가 모셔져 있습니다.
종묘건축의 부유하듯 장중하며 더해도 덜해도 완전한 채로 영원한, 관념과 실제가 공존하는 예혼(藝魂)의 공간을 어떻게 정확한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위대한 작품일수록 정확하고 분석적인 진술을 거부한다. - 김개천. 건축가, 국민대 교수
동양의 파르테논, 정작 외국 건축가가 와서 가장 감명받는 우리 건축물. 이용재선생이 극찬한 우리가 세계에 내세울 만한 건축물. 정면이 매우 길고 수평성이 강조된 독특한 형식의 건물모습은 종묘제도의 발생지인 중국과도 다른 건축양식으로 서양건축에서는 전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건축물입니다.
참고로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판소리, 강릉단오제, 강강술래, 남사당놀이, 영산재, 제주칠머리당 영등굿, 처용무, 가곡, 대목장, 매사냥, 줄타기, 택껸, 한산모시짜기, 아리랑, 김장문화 아니 정녕 이런 것까지??? 등 총 16건이 무형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찌는 듯한 한 여름 땡낮에, 양복을 입고 혼자 종묘에 갔더랬습니다. 토요일은 자유관람이 되지만 평일에는 문화해설사와 함께 하는 1시간짜리 관람만 허락되었습니다. 사실 나는 건축물에 관심이 있는데, 해설하시는 분은 제사와 행사에 더 중점을 둬서 말씀하셔서 조금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소박하면서 장중한 정전은 압권이었습니다. 건물도 건물이지만, 월대에 아무렇지도 않게 깔려 있는 박석과, 그 박석위에 서서 보는 월대의 텅빈 공간은 아주 경건한 마음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아부다비의 그랜드 모스크에 버금가는, 그러나 위압적이지 않으면서도 인간을 작은 존재로 만드는 무언가가 있는 건물이고 공간입니다.
4. 조선 마지막 중전, 그리고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서 황세손 이구까지 - 창덕궁 (1997)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 - 문화재청
창덕궁의 부용지와 주합루
창덕궁은 제1법궁인 경복궁의 보조궁궐로 지어졌으나 실제로는 조선왕조에서 가장 오랜 기간동안 궁궐로 쓰인 곳이며, 그래서 우리 건축물의 보물창고이기도 합니다. 정전인 인정전이 국보구요, 정문인 돈화문, 편전인 신정전과 희정당,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 왕의 데이트 코스인 부용지의 정자인 부용정과 낙선재, 금천교 등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궁궐건축 뿐만 아니라 낙선재와 연경당과 같은 살림집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창덕궁입니다.
위의 그림은 창덕궁의 배치도입니다. 산을 옮기고 땅을 다져서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속에 그냥 사뿐이 내려앉은 것 같은 그런 배치입니다.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궁궐배치인거죠.... 우리의 정서에 맞는 궁궐이고, 그래서 왕들도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더 좋아했습니다. 아래 글은 문화재청이 설명한 창덕궁입니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때 정궁으로 사용한 후 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258년 동안 역대 제왕이 정사를 보살펴 온 법궁이었다. 창덕궁 안에는 가장 오래된 궁궐 정문인 돈화문, 신하들의 하례식이나 외국사신의 접견장소로 쓰이던 인정전, 국가의 정사를 논하던 선정전 등의 치조공간이 있으며, 왕과 왕후 및 왕가 일족이 거처하는 희정당, 대조전 등의 침전공간 외에 연회, 산책, 학문을 할 수 있는 매우 넓은 공간을 후원으로 조성하였다.
정전 공간의 건축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여 높게 하였고, 침전건축은 정전보다 낮고 간결하며, 위락공간인 후원에는 자연지형을 위압하지 않도록 작은 정자각을 많이 세웠다.
건물배치에 있어 정궁인 경복궁, 행궁인 창경궁과 경희궁에서는 정문으로부터 정전, 편전, 침전 등이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궁궐의 위엄성이 강조된 데 반하여, 창덕궁에서는 정문인 돈화문은 정남향이고, 궁안에 들어 금천교가 동향으로 진입되어 있으며 다시 북쪽으로 인정전, 선정전 등 정전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편전과 침전은 모두 정전의 동쪽에 전개되는 등 건물배치가 여러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날 자연스런 산세에 따라 자연지형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고 산세에 의지하여 인위적인 건물이 자연의 수림속에 포근히 자리를 잡도록한 배치는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완전한 건축의 표상이다. 또한, 왕들의 휴식처로 사용되던 후원은 300년이 넘은 거목과 연못, 정자 등 조원시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건축사적으로 또 조경사적 측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후원은 태종 5년(1405) 창덕궁을 창건할 때 후원으로 조성하였으며, 창경궁과도 통하도록 하였다.
창덕궁 후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조원 시설로서 자연적인 지형에다 꽃과 나무를 심고 못을 파서 아름답고 조화있게 건물을 배치하였다.
여기서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가족이 여생을 보낸 낙선재를 살펴보겠습니다. 창덕궁의 건물을 다 살펴보려면 한 한달을 걸릴 것 같아서....ㅋㅋ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부인이 숨을 거두고,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가 삶의 마지막을 보낸 곳, 그리고 영친왕과 마지막 황세손 이구의 장례식이 열린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조선왕조의 최후를 담담하게 맞이한, 궁궐로써 마지막까지 자신의 역할을 다한 곳이 이 낙선재입니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그리고 마지막 황세손 이구
1895년 명성황후가 살해된 후 참담한 참담한 고종을 모시던 엄상궁은 1897년 44살의 늦은 나이에 은垠을 낳습니다. 고종의 일곱번째 아들인 영친왕입니다. 순종과 의친왕이 배다른 형입니다. 순종이 자식이 없자 황태자로 임명됩니다. 그리고 1907년 순종의 즉위식이 거행됩니다. 그러나 정작 순종은 없습니다. 아버지 고종을 강제퇴위시킨 일본에 대해 순종이 무언의 시위를 한 겁니다. 일본의 우두머리인 이토 히로부미 뿔따구 납니다. 황태자인 영친왕을 강제로 일본으로 보냅니다. 볼모입니다. 생모인 엄상궁은 눈물바다가 됩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 때 나타납니다. 쨔쨘~~~ 1909년에 이토 히로부미 자업자득으로 저세상으로 가고.... 1910년에 나라가 망합니다. 떠벌.....
일본으로 간 영친왕은 강제로 육군사관학교에 보내지고 그렇게 거의 가택연금 수준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1920년 마사코 여사와 강제 결혼. 종친회 난리가 납니다. 조선 황실의 황태자가 일본 여자와 결혼을??? 그럼 쫌 막아 보던가.... 다음해 아들 진 출생. 그러나 8개월만에 죽고.... 1930년에 일본 치요다구에 집을 짓습니다. 이듬해 아들 구玖가 태어납니다. 그렇게 살다가 일본 패망. 개명해서 마사코에서 이방자로 바뀐 여사의 아버지는 전범으로 구속, 재산을 몰수되고.... 집을 팔고 호텔로 전전합니다. 이 시절 순종의 계비 윤씨부인은 순종이 죽자 홀로 낙선재에 들어가서 궁궐을 지킵니다.
영친왕의 외아들 이구는 1953년 미국 유학길에 오릅니다. 이방자 여사가 극구 말렸지만 '넓은 세계로 가라, 나처럼 되지 말고 너의 길을 찾아라' 라고 아버지는 적극 지원합니다. MIT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유명 건축회사에 입사합니다. 그는 이제 황세손이 아니라 건축가의 길을 걷습니다. 이 때가 인간 이구의 전성기였습니다. 1959년 미국 여성인 줄리아 머록여사와 결혼합니다. 머시라? 황세손이 미국여자와 결혼을??? 이씨 종친회 또 난리를 칩니다. 그럼 김태희 같은 아가씨를 소개시켜 주던가....
이승만은 나라를 몽땅 차지할 욕심으로 영친왕이 아예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합니다. 5대 궁궐도 모두 몰수합니다. 이런 ㅆ ㅂ ㅅ ㄲ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인심씁니다. 1963년 영친왕 전격 귀국. 한해 먼저 환국해서 병 치료 중이던 이복동생 덕혜옹주와 눈물의 상봉을 합니다. 아~~~ 이제 낙선재는 사람 사는 것 같습니다. 수복헌에는 마지막 중전 윤비, 낙선재는 이방자 여사, 수강재에는 덕혜옹주, 이듬해 황세손 이구도 귀국합니다. 가난했지만 단란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이구는 서울대학교에 강의도 나갑니다. 왕족의 후예답게 귀티가 흐르고 행동 하나에도 품위가 있습니다. 건축가 김원이 은사였던 이구에 대해 쓴 짧은 글이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심 조선의 마지막 왕족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좀 더 잘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번 들어가 보시죠.....
http://blog.naver.com/leecorb?Redirect=Log&logNo=120115405346&from=postView
1966년 비워있던 궁궐을 홀로 지키셨던 조선 마지막 중전이 돌아가시고 1970년 영친왕도 낙선재에서 붕어하십니다. 조그만 사업을 하던 이구는 갖은 사기와 종친회의 괴롭힘 끝에 1977년 일본으로 도피합니다. 1982년 줄리아 여사와 이혼. 이젠 속이 시원하냐? 종친회 이 떠벌 넘들아!!! 1989년 덕혜옹주, 이방자여사, 시누이와 올케가 사이좋게 연이어 타계하시고.... 너무 힘드신 거죠. 낙선재는 문을 닫습니다. 그리고 황세손 이구는 2005년 일본 아카사카의 한 호텔에서, 누구 한 사람 지켜주는 이 없이 홀로, 참으로 고단했던 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차가운 시신은 이제 낙선재로 돌아와 우리 왕족의 마지막 장례를 치릅니다.
1847년 건립된 ㅁ 자형태의 낙선재. 솟을대문의 현판은 장락문이다. 오래도록 즐겁게 사는 집의 문...... 요동치는 우리 근현대사와 맞물려 파란만장하고 비극적인 일생을 보낸 조선 왕실들의 가족들을 생각하면, 어쩌면 그 역설적인 이름이 오히려 더 잘 어울리는 듯 하다.
5. 조선의 부흥을 꿈꾸던 정조의 이상향 - 수원 화성 (1997)
18세기에 완공된 짧은 역사의 유산이지만 동서양의 군사시설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약 6km에 달하는 성벽안에는 4개의 성문이 있으며 모든 건조물이 각기 모양과 디자인이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 문화재청
얼마전에 역린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정순왕후와 정조의 아주 팽팽한 싸움이 주 이야기인데요.... 정조 졸라 멋있게 나옵니다. 팔굽혀펴기하는 정조.....ㅋㅋ 정순왕후로 나온 한지민도 그 기세가 대단했습니다. 쿠데타가 실패하고, 졸라 쪽팔림을 당한 정순왕후는 복수의 칼날을 갈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30년 동안 갈다가, 결국 정조가 죽고 난 뒤 멋지게 뒤집어 엎습니다. 독한년.... 그 때 정조가 입술 앙다물고 딱 처리를 했어야 했는데......
정조를 손 봐주려는 그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고 정조 당연히 눈 뒤집힙니다. 옛날에 아버지 사도세가를 뒤주에 가둬놓고 물도 안주고 그렇게 죽인 주범인 노론들 다 처 죽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깁니다. 융릉입니다. 그리고 거기다가 새로운 조선의 이상향의 도시를 꿈꿉니다. 제2의 한양을 만들고 다시 시작하겠다!! 라는 정조의 포부가 닮긴 곳, 수원 화성입니다.
화성 건설 추진위원회가 발족되고 마스터 플래너에 채제공, 수석 건축가 정약용을 임명합니다. 전국의 돌쌓는 기술자 총 집결. 연 70만 인원 동원. 성 둘레 5.7Km, 전체 42만평. 정조는 좀 특이한 주문을 합니다. "튼튼한 거는 기본이고, 아름답게 지으라..... 아름다움이 능히 적을 이길 수 있다" 그렇게 해서 튼튼하고도 아름다운 성, 수원 화성이 완공됩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돌의 교축, 현안·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 문화재청
화성의 행궁(임금이 궁궐을 떠나 임시로 쉬어가던 처소)이다. 일제시대 때, 남낭헌을 제외한 거의 모든 건물을 뜯어 가고 헐었다. 1994년부터 복원했다.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 정조의 엄마인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기원하는 이름으로 봉수당이라 지었다. 역린에서는 김성령이 정조 엄마로 나왔는데.... 한지민이한테 많이 밀렸다..... 정조는 역시 이산의 이서진이다.
늙어서 다시 오마..... 그래서 이름도 노래당이다. 그렇게 말년을 여기서 보내고 싶어 했던 정조는 결국 자신의 꿈을 이루지도 못하고 49세의 짧은 일기로 세상을 뜬다. 정순왕후가 독을 탔다는 둥....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지금에 와서 정확한 사실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정조가 골초에 술도 말술이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한데.... 말 진짜 안듣는 신하들 데리고 일을 할려니 스트레스를 무지 받아서, 그리고 원래 말술에 골초라는 것이 더해지면서 일찍 세상을 뜬게 아닌가 하는게 일반적인 추측이다.
실제 정조는 왕들계의 엄친아였습니다. 일단 천재입니다. 읽으면 다 압니다. 책을 끼고 삽니다. 엄청나게 읽어 재낍니다. 그렇다고 누구처럼 공부벌레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무예도 출중했습니다. 활쏘기는 거의 김수녕급이라고 합니다. 역린에서 현빈이 엄청난 활 실력을 보여주는데, 실제도 그랬댑니다. 시서화도 뛰어나고 의술에도 조예가 깊었댑니다. 또한 조선 왕중에서 3대 이빨에 낄 정도로 말빨도 죽인다고 합니다. 세종의 그 언변과 학식에 태종의 불같은 성정이 합쳐진 거의 완전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노무현 대통령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됩니다. 그 말빨부터, 말 안듣는 신하들, 출신성분에 대한 주위의 비하.... 그리고 결정적인 건 천도를 꿈꾸다 결국 실현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는 점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장안문의 모습. 처음에 대수롭지 않게 보았다가 내 눈을 의심했다. 그리곤 다시 자세히 보았다. 혹시나 뽀샵이 아닐까??? 이런!!!!!
수원성의 완전복원에는 1조 이상의 예산이 필요하고 시간도 무지 오래 걸린단다. 나라에서 돈을 엄한 데다 쓰니 돈이 없다.
정조의 릉인 건릉. 아버지 사도세자 옆에 누웠다. 사도세자의 릉인 융릉과 함께 융건릉이라 불린다.
수원화성박물관. 정림건축의 이후락씨가 설계했다. 공심돈을 공간화한 전망대에서 화성 전체를 바라볼 수 있다. 화성 안에서 화성을 다시 보는 거다.
6. 언제나 훌륭한 소풍 장소이자 나들이 코스이자 답사지 - 경주 역사유적지구 (2000)
경주역사유적지구는 한반도를 천년이상 지배한 신라왕조의 수도로 남산을 포함한 경주 주변에 한국의 건축물과 불교 발달에 있어 중요한 많은 유적과 기념물들을 보유하고 있다. - 문화재청
김해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로서는 경주는 언제나 손쉽게 다녀올 수 있는 가장 좋은 소풍장소이자 데이트코스이기도 하며 아이들과 나들이에도 가장 만만한 곳이며 문화유산 답사에도 그만입니다. 그렇지만 실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계절에 따라, 가는 곳에 따라, 언제나 좋습니다. 일본의 역사유적지구인 교토, 나라와 비교해도 유적의 밀집도와 다양성에서 더 뛰어나다고 합니다. 경주 역사유적지구은 5개 지구로 나누어집니다.
1. 불교 미술의 보고 - 남산지구
2. 천년 왕조의 궁궐터 - 월성지구
3. 신라 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 - 대릉원지구
4. 신라 불교의 정수 - 황룡사지구
5.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 - 산성지구
경주 남산은 거대한 야외박물관이라 불릴 정도로 유적이 엄청납니다. 대충 세어봐도 보물만 14개입니다. 미추왕릉, 미륵곡 석불좌상, 칠불암 마애석불, 남산리 삼층석탑 등 남산만 보는데도 하루 온종일 가지고 모자랍니다. 월성지구에는 월성과 계림, 그리고 첨성대가 있구요, 대릉원지구에는 천마총을 포함한 산만한 무덤들이 천지입니다. 사람 없을 때 살짝 무덤 꼭대기에 올라가봐도 재미있습니다. 들키면 쪽팔립니다. 황룡사지구에는 황룡사터와 분황사가 있구요 산성지구에는 명활산성이 있습니다.
유홍준 선생의 감탄과 감동을 자아낸, 근데 이냥반도 하도 구라가 심해서...ㅋㅋ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했다던 그 감은사지 삼층석탑이다. 우리나라 석탑계의 대표선수이다. 원래 용이 된 문무왕을 모실려고 여기에 절을 세웠다. 문무대왕릉이 가까이에 있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문무왕이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여기에 뿌려라! 용이 되어 왜구의 침략을 막겠다" 이런 왕구라를? 라고 했다능.... 근데 이건 역사적 사실이랜다. 저 돌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왕릉이냐, 그냥 화장해서 유해만 뿌린거냐.... 머 이런 논란은 아직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머 그런 사실적 관련이 중요하것냐.... 믿고 안믿고 하는 우리 마음이 더 중요하지.
경주 대릉원 전경. 저 무덤 꼭대기는 못 올라간다. 올라가는 사람도 없고, 보는 사람이 너무 많다. 시내에서 좀 떨어진 무열왕릉 정도에 가면 한번 도전해 볼 만하다.
황남대총이다. 멀리서 보면 정말 여인의 가슴이다. 무덤인데도 불구하고 경주의 이 무덤들은 정겹다. 무덤 앞에서 돗자리깔고 김밥 싸온 거 까묵으면 정말 맛있다.
동양 최고의 천문시설인 첨성대..... 라고 되어있는데.... 저 안에 들어가서 별을 보면 좀 더 잘 보일래나??? 맨 위가 네모나서 스크린처럼???? 그리고 저 안에는 어떻게 들어가나? 사다리 받치나??? 음... 쫌 의문스럽다. 여하간 모양자체는 폼 난다.
전국 향교중에서 전주향교 다음으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경주향교다. 향교는 국립대학의 기능이지만 사당의 기능도 충실히 수행한다. 서원이 그런 것처럼. 그래서 앞의 명륜당은 교실, 뒤의 대성전은 사당이다. 서원은 배향하는 선비가 대체로 정해져 있다 치고... 그럼 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5대 성인, 송조 6현, 공자 수제자 10철, 한국 18현.... 머 이런 사람들을 제향한다고 한다. 머.. 다른 나라 사람들이 많네....
절경이다. 안압지는 신라시대의 궁궐이다. 즉, 왕들이 심심하면 언니들이랑 노는 별궁이었다. 2개의 전각이 복원되었고, 전체 궁궐도 복원계획을 가지고 있다. 단, 돈이 없다.
까마귀가 신라 소지왕의 목숨을 구했다는 서출지. 여기는 이요당이라는 정자가 있다. 요산요수, 뒤의 남산도 좋고 앞의 서출지도 좋아서 이요당이다. 아름다운 풍경의 서출지에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정자 이요당의 조합이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천년 고도의 가장 찬란했던 황룡사의 흔적은 이제 모두 유채꽃밭이 되고..... 황룡사터 옆에 있는 구황동 당간지주만이 우뚝 솟아 그저 짐작만 할 수 있게 한다.
써 놓고 보니 아직 못 가본 곳이 많습니다. 하긴 뭐 여유있게 보려면 일주일 가지고 되겠습니까만...... 암만 봐도 대단한 도시입니다. 앞서 살펴본 석굴암과 불국사도 세계문화유산이고, 경주 자체도 세계문화유산이고, 또 뒤에서 살펴 볼 양동마을도 세계문화유산입니다. 그러고보니 우리나라의 10개 문화유산 중에 3개가 경주에 있네요..... 제가 사는 동네도 역사적으로 봐선 경주에 비견 될 만한 동네지만 온 천지 공장밖에 안 보이고. 좀 많이 샘이 나는 동네입니다.
더하여, 얼마전에 신라 왕궁을 복원하고 황룡사도 다 복원하고.... 머 그런 것이 확정되었다고 합니다. 2025년까지 약 1조원 가까이를 들여서 추진한다고 합니다. 반가운 소식입니다. 십년 후면 황룡사 9층탑을 볼 수 있다니..... 다만 하는 김에 제대로 했으면 하는 바램은 간절합니다.
7. 거석 문화의 한국 대표 - 고창 · 화순 · 강화 고인돌 유적 (2000)
고창, 화순, 강화의 선사유적들은 거대한 석조로 만들어진 2,000∼3,000년 전의 무덤과 장례의식 기념물로서 선사시대 문화가 가장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당시의 기술과 사회현상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적이다. - 문화재청
거석 문화는 아직도 우리에겐 여전히 신비입니다. 이집트 피라미드도, 영국의 스톤 헨지도, 그리고 가장 경이로운 이스터섬의 모아이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되니까 외계인설도 나오고 그럽니다. 고인돌도 옛날 우리 할배들이 심심해서 취미생활로 만들지는 않았을 겁니다. 뭔가 그 시대에서 나름 의미가 있고, 그 사람들한테는 쫌 절박한 무언가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니까 그토록 열심히 만들었겠지요....
칠레 산티아고에서 약 3700Km 떨어진 이스터섬의 거대 석상 모아이. 생김새가 너무나 해학적이다. 돌하르방의 서양 버전쯤 될까나......
고인돌은 전세계적으로 6만기가 있다고 하는데 그 중에 3만기가 한반도에 있고 그 3만기중에 2만기가 전라도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라도 일부 동네에서는 집을 지으려고 보니까 무지막지한 돌덩이가 막고 있고 치우기도 너무 크고 해서 그냥 안에 두고 지은 뒤 알고 보니 고인돌이더라하는 집도 더러 있었댑니다. 무엇보다 그 큰돌을 운반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작업이었을텐데요, 1톤의 돌을 옮기는데 장정 10명정도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울나라 고인돌 중에 가장 큰 것은 80톤정도 나간다고 하는데요, 그러니까 약 800명의 장정이 있어야 그 돌을 옮길 수가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전북 고창에 있는 고인돌 유적지입니다. 한동네에 수백기가 모여있어서 한국의 스톤헨지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 동네 사람들은 예전부터 돌을 가지고 잘 놀았는지 고창읍성도 원래 상태로 잘 남아있다고 합니다.
세바퀴를 돌면 무명장수한다고 하는 고창읍성. 실제 돌아보면 졸라 빡시다고.... 그래서 세바퀴를 돌면 무병장수는 게 아니라 무명장수할 사람만이 세바퀴를 돌 수 있다고.....ㅎㅎ
고창 선운사 석탑이다. 아줌마들이 아주 좋아한다고....ㅋㅋㅋ 고창을 검색하다 혼자 웃었다. 아내 데리고 함 가서 보여줘야 되겠다.ㅋㅋ
8. 게으르게 시간 보내기 좋은 곳, 그리고 왕과의 대화 - 조선 왕릉 (2009)
조선시대의 왕릉은 조선시대의 국가통치 이념인 유교와 그 예법에 근거하여 시대에 따라 다양한 공간의 크기, 문인과 무인 공간의 구분, 석물의 배치, 기타 시설물의 배치 등이 특색을 띠고 있다. 특히 왕릉의 석물 중 문석인, 무석인의 규모와 조각양식 등은 예술성을 각각 달리하며 시대별로 변하는 사상과 정치사를 반영하고 있어서 역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뛰어난 문화유산에 속한다. - 문화재청
우리동네에도 왕릉이 있습니다. 김수로왕릉과 허왕비릉입니다. 어릴 때 소풍도 가고 커서도 산책하기 좋은 코스라 가끔 다녀오곤 합니다. 가까이 경주만 가도 산만한 왕릉이 많아 무덤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오곤 했습니다. 조선 왕릉은 멀리 있음 성묘하러 가기 힘들어서, 영월에 귀양가서 죽은 단종릉과 세종의 릉이 있는 여주 영릉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양에서 100리 안에 있습니다.
왕릉은 물론 무덤이 제일 중요하지만, 제사를 모시는 공간(정자각)도 있고, 왕릉이라 무덤을 지키는 문지기가 기거하는 공간(수복방)도 있고, 무덤앞에는 여러가지 석상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잠깐 공부를 좀 해보고 갈까요???? 물론 저도 공부 이런 거 별로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그래도 왕릉 갈때 이 정도만 알고 가도 마눌한테 쫌 우세는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ㅎㅎㅎ
태조 이성계의 무덤인 건원릉이다. 죽으면서 고향땅인 함흥에 묻어달라고 했다는데, 아들 이방원이 그냥 가까운데 묻었다고 한다. 그래도 아버지의 유언이 있는지라 함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가 능에 심었다고 한다.
현종의 무덤인 숭릉이다. 효종의 아들이다. 이 분은 조선 역대 왕들중에 유일하게 외국(청나라)에서 태어나셨다. 왕릉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각(보물 1742호, 보통의 정자각은 맞배지붕이나 이 정자각은 팔작지붕이다. 화려하다.)을 가졌다는 평이다.
숙종의 릉인 서오릉중의 하나인 영릉이다. 인현황후랑 나란히 누워계시다. 살아서 억세게 여복이 터진 숙종은 돌아가셔서도 여복이 터졌다. 여기에 장희빈의 묘까지, 마누라 4명이 누워계신다. 아마도 졸라 시끄러울것 같은...ㅋㅋ 그래도 좋으시려나???
단종이 죽고, 세조의 서슬퍼른 눈초리에 시신 수습을 아무도 안했는데, 지역의 호장이었던 엄흥도란 냥반이 시신을 수습해서 뒷산에 묻었다. 그냥 봉분도 없는 평평한 자리라 어디가 어딘지 분간을 할 수 없는데, 그래도 이 자리가 동네에서는 아무도 밟지 않는 신성한 자리로 여겨졌다고 한다. 숙종 때 장릉으로 복원되면서 목숨을 걸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이 엄홍도는 사육신 다음의 높은 공을 인정받았다.
중종의 묘인 정릉의 석인
가장 파란만장했던 삶을 산 정조의 무덤인 건릉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묻혀 있는 융릉과 같이 수원(정확히는 화성)에 있다. 수원 답사길에 화성과 함께 보면 좋을 듯하다. 정조의 묘는 그래서 한번 가서 보고 싶다. 정조에게 여러가지 물어 볼 것도 좀 있고......
사실,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조선 왕들의 무덤에 많은 의미를 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진입공간이니, 제향공간이니, 능침공간이니 하는 것도 그렇고..... 단지 그저 아내와 아이들이 같이 가서 돗자리 펴고 앉아, 옛날의 그 왕들에 대해서 쓸데없는 공상을 하며 하루쯤 게으르게 보내기 딱 좋은 곳, 머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9. 우리나라 국가대표 마을 -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 (2010)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
한국의 대표적 씨족마을이면서 양반마을인 하회와 양동은 모두 조선시대(1392~1910)에 양반문화가 가장 화려하게 꽃피었던 한반도 동남부(영남지방)에 위치하고 있다. 두 마을은 한국의 대표적인 마을 입지 유형인 배산임수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여름에 고온다습하고 겨울에 저온건조한 기후에 적응하기 위한 건물의 형태와 유교 예법에 입각한 가옥의 구성을 지니고 있다. 두 마을에는 양반씨족마을의 대표적인 구성요소인 종가, 살림집, 정사와 정자, 서원과 서당, 그리고 주변의 농경지와 자연경관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유형 유산과 더불어 이들과 관련된 많은 의례, 놀이, 저작, 예술품 등 수많은 정신적 유산들을 보유하고 있다. - 문화재청
화회마을과 양동마을은 여기 세계문화유산중에 하나의 챕터에서 다루기에는 사실 내용이 너무 방대합니다. 어디까지 가봤니? 울나라 건축물 14 - 하회마을에 있는 고택과 옛 건물 정도로 해서 다루어야 될 내용입니다. 그 만큼 의미있는 옛 건축물들이 즐비한 동네가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입니다. 여기서는 하회마을의 고택중에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양진당과 충효당, 그리고 이 마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화경당(북촌댁)을, 양동마을도 보물 건축인 관가정, 무첨당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낙동강물이 굽이 돌아가는 마을인 하회河回마을의 전경이다. 풍산 류씨의 집성촌이자 하회 별신굿 탈놀이로도 유명하다. 원래 하회마을에는 김해 허씨와 광주 안씨가 모여 살았다. 하회탈도 김해 허씨들이 처음 만들었다고 하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풍산 류씨들의 가문이 점점 번성하게 되고 허씨와 안씨들은 일부 이주도 하고 해서 결국은 류씨 왕국이 되었다.
고택들이 즐비하다. 풍산 류씨 대종택인 양진당, 그리고 서애 류성룡의 종택인 충효당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그 외에도 남촌댁, 북촌댁, 하동고택 등등, 그리고 옥연정사, 원지정사 등등.... 그런 큰 집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초가집들도 많아 볼거리가 쏠쏠하다. 그 초가집에는 현재에도 사람이 살고있다.
현재는 100가구 정도가 살고있다. 주민의 70%가 풍산 류씨라고.... 이렇게 같은 성씨들이 한 마을에서 오랫동안 사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고 한다. 그러니까 세계문화유산이겠지....
하회마을이 결정적으로 유명해진 건 바로 이 할머니땜시.... 1999년에 방문해서 여기서 생일상을 받았는데.... 이에 열받은 라이벌 양동마을도 뭔가 해야지하고 이 이후부터 양동마을도 대대적으로 정비를 했다는 후문이.... 근데 이 할매 아직도 정정하시댄다. 나도 저 할매땜시 처음 하회마을에 가봤다. 그 때 엄니랑 막내이모님이랑 같이 갔었는데, 류시원네 집 대청마루에 앉아 햇볕쬐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류씨 마을의 상징, 풍산 류씨 대종택 양진당이다. 서애 류성룡의 형인 겸암 류운룡의 종택이자 아버지인 입암 류중영의 집이라는 입암고택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이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다.
입암 류중영 (1515 ~ 1574)은 황해도 관찰사, 경연관등의 벼슬을 하고 새로운 터를 잡기 위해 유람한다. 그러던 중 도산서원에 가서 퇴계 선생한테 명당자리를 묻는다. 퇴계선생 왈 부용대로 가거라... 부용대에 올라서니 낙동강이 굽이치는 마을 하회가 보인다. 미리 터를 잡고 있던 허씨 안씨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 집 양진당을 짓는다. 진리를 기르는 집. 99칸으로 지어졌으나 현재 53칸이 남아있다.
사실 저 집도 집이지만 지금 저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양진당의 제사는 불천위 포함 일년 18번이다. 그 제사가 우리집 제사 같겠냐고..... 한번 할 때마다 엄청날텐데...... 종부들이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요즘 저 집에 며느리로 들어갈 색시가 있으려나.... 내가 다 걱정이 된다.
서애 류성룡 선생의 종택 충효당이다. 겸암과 서애 모두 퇴계 선생의 제자들이다. 둘다 무지 똑똑하고 엘리트 코스를 밟았는데, 형은 벼슬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서애 선생의 가장 멋진 점은 물론 학문도 뛰어났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바다에는 이순신, 땅에서는 권율 장군을 각각 임명하고 그들이 잘 싸울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한 일이다. 열씨미 일해라고만 하지, 열심히 일 할 환경을 조성해 주는 상사나 회사는 많지 않다. 누구는 좀 본받아야 된다. 류성룡의 손자 때 와서 그의 제자와 유림들이 십시일반 돈을 걷어 52칸의 집을 지었는데 이것이 충효당이다.
57세에 삭탈관직 아니? 이런 분도?? 당하고 고향에 내려와서 책을 쓴다. 임진왜란에 대해서 여러가지 자기의 생각을 적었다. 징비록이다. 국보다. 그리고 초가삼간에서 안빈낙도하다 66세의 일기로 눈을 감는다. 유언은 이렇다. 첫째, 임금과 어버이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했다. 둘째, 벼슬은 지나치게 높았는데 일찍 물러나지 못했다. 세째, 도를 배우겠다는 뜻을 품었으나 이룩한 것이 없다.... 아, 유언도 자기 반성형이다.
징비록을 썼다는 옥연정사. 징비라는 것이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여 미래를 대비하자.... 머 이런 뜻이다. 옥연정사의 정사精舍라는 것은 도 닦은 집이다. 건들지 마라는 거다. 집안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가 생각나고 나라가 어지러우면 훌륭한 재상이 생각난다... 라는 말에 딱 들어맞는 인물이 서애 선생이다. 그럼 우리 아내는???
하회마을에서 가장 큰 규모(72칸)이며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받는 집, 화경당 북촌댁이다. 이 집의 품격은 사랑채에서도 나타나는데, 할배가 사는 북촌유거, 아들이 사는 화경당, 손자가 있는 수신와가 각각 분리되어 있다.
이 집이 안동에서 명성을 얻은 것은 1859년에 일어난 홍수때문이라고 하는데, 이 때 강 저쪽 부용대에서 오던 배가 뒤집어졌다. 수십명이 물에 빠졌다. 강변에는 화경당을 지어려고 류도성이 애지중지 3년간 말린 나무들이 쫙 있었는데, 이 냥반이 그냥 구조용 웃기 대신으로도 쓰고 불 피우는 장작용으로도 쓰고... 그래서 많은 사람을 구했다. 류도성은 어렵사리 춘양목을 다시 구해서 또 3년 동안 말려서 이 집을 지었다고 한다. 이 때부터 이 집은 많은 인심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소작료도 다른 집보다 싸게 받았다고 한다. 다른 집이 6할 받을 때, 이 집은 5할을 받고 그도 여의치 않으면 4할로 감면해주고.... 부자들 때려잡는 동학군도 여기 와서는 그냥 정중하게 인사만 하고 갔다는 소문이..... 역시 부자가 모범을 보이면 나라가 흥한다. 지금 우리 시대 부자들은 어떤가??? 할 만 한가??? 우리 회장님, 졸라 부잔데, 더 부자될려고 회사돈 끌어쓰다 들켜서 지금 감옥 살고 계신다. 이거 미친거다.... 씨봐.
초가집도 멋지고, 골목길도 좋고. 하회마을을 더욱 매력적이게 해주는 초가집과 골목이다.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집성촌 양동마을. 현재 150가구가 살고있다. 우리나라 양반 마을의 형태를 잘 보여주는 동네다. 경작지 와 주거지, 그리고 의식 공간이 구별되어 있다. 높은 곳에 양반집이 있고 그 아래 상민들이 사는 집들이 양반집을 둘러 싸듯 배치되어 있다. 원래는 손씨의 집성촌이었는데, 이씨들이 처가 살이 하면서 같이 살게 되었고, 이언적이라는 당대의 석학이 나타나면서 이제는 이씨들이 훨씬 더 잘나가는 동네가 되었다.
양동마을에 와서 고택투어를 한번 하면 아마 웬만해서는 옛집에 대해 질릴거다. 그만큼 운치있는 옛집들이 즐비하다. 대략적으로 기와집 오십여채, 초가집 백열채가 있다.
손씨의 종택 서백당이다. 조선 초기 개국공신인 손소가 원래 여기 살던 풍덕 류씨 집안으로 장가들어 터를 잡았다. 그리고 이 서백당을 짓는다. 1454년. 500년도 넘은 집이다. 여기서 둘째 아들 손중돈이 태어난다. 이 양반 건교부 장관까지 지내고 벼슬아치의 최고 영예인 청백리를 하사 받는다. 조선에서 청백리를 하사 받은 선비는 총 219명.
손중돈의 여동생이 서백당에 몸 풀러 왔다. 아들 낳음. 손중돈은 아이의 떡잎을 일찍부터 알아보고 직접 가르친다. 그 아이가 바로 동방오현중의 한명인 회재 이언적. 서백당을 지을 때 도인이 이 집에서 현인이 3명 난다고 했는데.... 손중돈과 이언적, 그리고 한명은 아직인데......ㅎㅎㅎ
양동마을에 처음 이사온 이번이 서백당을 보고 지은 집 무첨당. 여강 이씨의 종택이다. 이제 우리도 집 생겼다. 손씨들이랑 같이 살자. 무첨당,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하는 집. 보물 건축이다. 위 건물은 공부도 하고 차도 마시고 하는 별당이자 제사를 지내는 제당이기도 하다.
대원군이 무첨당을 찾았다. 이 집... 보통이 넘는군!!. 하룻밤 묵고 숙박료는 무조건 일필휘지. 좌금서해 左海琴書 선비는 책을 읽지만 풍류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도 김마담한테 간다. 이 현판은 아직도 무첨당에 걸려있다. 이 집에는 현판이 많다. 물애서옥 (물애는 무첨당이 있는 곳), 오체서실 (이언적의 다섯 손자가 공부하는 곳), 창산세거 (설창산에서 대대로 살아오는 집) 등등
무첨당에서의 어부인......
손소의 아들 손중돈이 분가해서 지은 집.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식이 커 가는 모습을 본다 라는 뜻의 관가정이다. 엄마와 함께 느림 여행이라는 책을 지은 최경숙 건축가는 이 책에서 관가정을 보고 신사의 품격이 느껴지는 집이라 했다. 향단이 남에게 보이는 것을 중요시하여 지은 집이라면, 관가정은 내가 보는 시선을 중요시하여 지은 집이다. 그래서 관가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전망은 빼어나다.
손중돈은 여동생의 아들, 회재 이언적을 어릴 때부터 글을 가르치고 뜻을 세우게 하고 관직에 나가도록 했다. 숙부이자 스승이었던 셈이다. 손중돈과 이언적 이후 두 가문은 선의의 경쟁을 펴기도 하고 또 때론 서로 도우면서 이 양동마을을 대표 양반마을로 발전시켜 왔다. 그리고 서로 싸웠다는 얘기도 많더라
경절공 우재 손선생 고택이다. 경절공은 손중돈 선생이 사후에 받은 시호다.
관가정에서의 어부인.....ㅎㅎ
요건 향단. 어디까지 가봤니? 울나라 건축물 8 - 한번쯤 묵어가고 싶은 우리 옛 살림집 편 참조하시면 되겠다.
문이 굳게 닫혀있다. 어느 싸이트에 들어가니 향단에서 한옥스테이는 계속 하던데..... 잘 모르겠다. 문중에서 개방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가 나온다는 소문도 있고.... 하긴 관람객인 우린 좋지만, 사는 사람은 하루이틀도 아니고.... 각 집에 대해 관람료를 따로 받으면 좋을텐데..... 보는 사람도 당당해지고, 종가측에서도 관리비가 생기고...
여기는 경산서원.... 마루에 걸터 앉은 막내 아들이 운치가 있다....
170년된 아주 청년같은 집, 안골 맨 꼭대기에 있는 집, 창은정사이다. 전형적인 ㅁ자 고택에다 아주 공들여 잘 지은 집이라고 한다. 이 좋은 집에 현재 사람이 살진 않는다. 집 주인은 서울에서 직장생활하고 있다고.... 친척분이 관리차원에서 울산과 경주를 왔다갔다 하고 있다고 한다.
사방으로 갇힌 ㅁ자형 집은 경북 북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집인데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나라의 기강이 헤이해져서 집과 가족들의 보호 차원에서 이런 식으로 많이 지었다고 한다. 석등이 있는 아담한 정원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여기는 그 유명한 수졸당이다. 수졸당을 승효상 선생이 설계한 유홍준 선생의 집인 줄로만 알았었다... 첨에는.... 이런게 부끄럽다. 그 수졸당 못지 않게 운치가 있는 원조 수졸당이다.
10. 병자호란, 인조, 그리고 아픈 역사 - 남한산성 (2014)
남한산성은 16세기와 18세에 이르는 기간 동안 동아시아의 한국과 중국 일본 간에 산성 건축술이 상호 교류한 중요한 증거이다. 남한산성은 국제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 무기 발달과 축성술이 상호 교류한 탁월한 증거로, 조선의 자주권과 독립성을 수호하기 위해 유사시의 임시수도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계획적으로 축조된 유일한 산성 도시이다.
또한, 남한산성은 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 단계와 무기 체계의 변화상을 잘 보여준다. 남한산성은 험한 지형을 활용하여 성곽과 방어시설을 구축함으로써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단계를 잘 나타내고 있다 - 문화재청
임금은 젖은 땅에 무릎을 꿇었다. 임금이 이마로 땅을 찧었다. 구부린 임금의 저고리위로 등뼈가 드러났다. 비가 등뼈를 적셨다. 임금의 어깨가 흔들렸고, 임금은 오래 울었다. 막히고 갇혔다가 오래 터져나오는 울음이었다. 눈물이 흘러서 빗물에 섞였다. 임금은 깊이 젖었다. 바람이 불어서 젖은 옷이 몸에 감겼다.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 김훈의 남한산성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피난가던 인조의 어가행렬이 청의 군사를 피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12월 14에서 출성하는 1637년 1월 30일까지의 47일간의 기록인 김훈의 남한산성.... 소설에서 결국 인조는 청나라 칸에게 무릎을 굽히고 머리를 조아립니다. 그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 바로 남한산성입니다.
인조반정 즉 광해군을 왕에서 끌어내리는 쿠데타의 주역중에 이서 라는 냥반이 계신데 이 양반이 1623년에 수방사 총사령관이 되어서, 신라 문무왕때 쌓은 주장성 옛터에 남한산성을 축조하러 옵니다. 그리고 스님들과 열씨미 쌓아서 3년만에 남한산성이 완공됩니다. 인조는 미리 예상했을까요?? 그리고 꼭 10년 후 인조는 여기로 피난오게 됩니다.
남한산성에서 바라 본 서울.....
피난와서 인조는 더 힘듭니다. 적은 바로 앞에 있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고통의 시간입니다. 온몸이 바늘 찌르듯이 아프다 라는 말이 이해됩니다.
김상헌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화친은 가당치 않사옵니다. 심양에서 예까지 내려온 적이 빈손으로 돌아갈 리도 없으니 화진은 곧 투항일 것이옵니다. 화친으로 적을 대하는 형식을 삼더라도 지킴으로서 내실을 돋우고 싸움으로써 맞서야만 화친의 길이 열릴 것이며 싸우고 지키지 않으면 화친의 길은 마침내 없는 것이옵니다. 적의 문서를 군병들 앞에 불살라 보여서 싸우고 지키려는 뜻을 밝히소서"
최명길은 더욱 낮은 소리로 말했다. "예판의 말은 말로써 옳으나 그 헤아림이 얕사옵니다. 화친을 형식적으로 내세우면서 적이 성을 서둘러 취하지 않음은 성을 말려서 뿌리 뽑으려는 것이온데, 앉아서 말라 죽을 날을 기다릴순 없사옵니다. 안이 피폐하면 내실을 도모할 수 없고, 내실이 없으면 어찌 나아가 싸울 수 있겠습니까. 싸울 자리에서 싸우고 지킬 자리에서 지키고, 물러설 자리에선 물러서는 것이 사리일진대, 여기가 대체 어느 자리이겠습니까. - 김훈의 남한산성
나보고 우짜라고!!! 우이씨!!! 왜 맨날 나만 가지고 그래??? 너거가 왕해!!! 나 안해!!!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지은 건축물이다. 이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에 있던 5개의 장대중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며, 성 안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사진은 1892년에서 1893년 사이에 찍은 것이며, 파리 만국박람회의 엽서 그림으로도 사용되었다.
인조가 삼전도에 나아가 칸에게 세번 절하고, 한번 절 할때마다 이마을 세번씩 조아려햐 했던 삼배구고두의 치욕과 청나라 심양에 8년 동안 볼모로 잡혀있다 돌아왔지만 끝내 한을 풀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 이들의 원한을 잊지말라는 뜻에서 영조는 무망루라는 현판을 이 수어장대에 달게 했다.
남한산성은 하회마을과 안동마을에 이어 올해 4년만에 10번째 세계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세계유산(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을 모두 포함)으로 따지면 11번째입니다. 무엇보다 경사입니다.
참고로 제주도의 한라산과 성산일출봉, 그리고 거문오름 용암동굴계는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계라는 이름으로 2007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세계자연유산 제주 성산일출봉. 어이쿠...... 무서우신 사모님 나오셨어요???
우리의 세계문화유산은 참 거닐기 좋은 곳이라는 인상을 글 쓰는 내내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랑스럽고 훌륭한 유산이 있는가 하면 역사적으로 참 가슴 아픈 유산도 있습니다. 창덕궁 낙선재가 그렇고 수원 화성이 그렇고 남한산성이 그렇습니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된다고 협박하는 책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정말 안 가보면 안될 것 같아 굳이 남의 나라까지 보고 오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물론 여유가 되면 남의 것도 한번 가 보는 것 적극 추천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여유있게 거닐고 싶은 우리의 대표 문화유산이, 남들의 그것보다 더 아름답고 또 아픈 유산들이 있습니다. 그럼 한번 아이들 손 잡고 거닐어 볼까요.....
이용재 선생의 인문학적인 집짓기와 독서 같은 여행 비니버미님, 그리고 엽토 51님의 쏠쏠한 일상의 블로그에서 대부분의 사진과 글을 옮겨왔습니다. 그 외에 흐르는 강물처럼님과 발랄한 학생일기님의 티스토리, 다음의 바람꽃과 솔사리, 충주전통문화회, 사월과 오월, 오후의 산책처럼, Kida의 행복한 수다님의 블로그, 네이버의 하데스, BlueMiR, 산 강 숲에서 우리 함께 머무를수 있다면님의 블로그, 성낙주의 석굴암 미학연구소, 연합뉴스, 이글루스의 하늘사랑님 블로그, 위키백과와 엔하위키 미러, 그리고 문화재청의 글을 참고하였습니다.
'건축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디까지 가봤니? 울나라 건축물 8 - 졸라 가려 뽑은 등록문화재 30선 (2) | 2014.07.12 |
---|---|
어디까지 가봤니? 울나라 건축물 7 - 가장 귀한 보물, 울나라 국보 건축물 24점 (10) | 2014.07.07 |
어디까지 가봤니? 울나라 건축물 5 - 찾아보고 싶은 한국의 건축가 10인 (10) | 2014.06.28 |
어디까지 가봤니? 울나라 건축물 4 - 한번쯤 묵어 가고 싶은 옛 살림집 8점 (4) | 2014.06.22 |
어디까지 가봤니? 울나라 건축물 3 - 내맘대로 골라골라 근대건축 20선 (0) | 2014.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