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PCT (판교 Crest Trail)
75일째. 딱 절반이 지났다.
지난 10월 말 판교의 이 프로젝트로 이동했다. 준공 5개월 남은 아수라가 한창 전개되는 프로젝트로 말이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잘 알지 못하는 특수한 성격의 건물과 경험해 보지 못한 날씨에 나는 힘들어 했다. 때마침 그 때 셰릴 스트레이드의 '와일드'를 만났다. 스물일곱 살의 시궁창 인생을 보내던 여자가 우연한 계기로 지옥과 같은 4300Km의 Pacific Crest Trail를 혼자 걸으며 발가벗은 자신을 마주하며 마음속의 그 무언가를 발견해 가는 과정을 그린 책이다.
옳다구나. 딱 내 처지인걸. 이 현장에서 보내야 할 날이 150일이니 하루하루 고통스런 PCT를 걷는다 생각하고 지내다보면, 나도 셰릴처럼 내 안의 무언가를 찾을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완주했을 때의 뿌듯함 정도는 느낄 수 있겠지. 그런 마음으로 출근을 하고 하루를 카운트 했더랬다.
이젠 사람들도 일도 많이 익숙해졌다. 태어나서 거의 처음 만나보는 추위도 적응이 되더라. 처음에는 빨리 마치고 집에 가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야지... 하는 생각에 몇 번씩이나 퇴근을 생각했는데, 요즘은 아니 벌써 퇴근할 시간이야? 정도로 하루가 금방이다.
아마도 남은 75일은 더 빨리 지나갈 거다. 하루는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도 이제는 견딜만한 것이 되어버려 고통으로 인해 나를 되돌아 본다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발가벗은 나를 마주하기 보단 그것 자체를 무감각하게 바꾸어 버렸다. 셰릴이 여행의 마지막에 그토록 힘든 야외 생활과 작별하려니 그게 걱정이 되었다고 하는데, 나도 이제 그런 느낌도 든다.
잘 헤쳐왔다고, 잘 견뎌왔다고, 남은 75일도 잘 지내보자고 쓰려고 했는데 글이 좀 벗어났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충실하게 하는 것이 셰릴을 따라가는 길이다.
근데, 이 PCT를 끝내고 나면 또 다른 PCT가 기다리고 있다는 게 함정이다. 지금 형태의 노가다를 계속 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