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 묵어 가고 싶은 옛 살림집 8점
건축물에 대한 글을 쓰려면 일단 좀 알아야 됩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배경으로 지었는지, 어떤 재료로 지었는지, 형태와 내부는 어떠한지, 그래서 이 건물의 특징이 무엇인지.... 이런 걸 알아야 하니 자료를 찾고 제 방식대로 정리합니다. 그러다 보니 건축공부가 자연스레 됩니다. 전통건축과 근대건축, 그리고 현대건축.... 공부하는 재미도 쏠쏠하거니와 그러다 보니 가고 싶고 보고 싶은 건물들도 더 많아집니다. 그래서 가서 보면 더 많이 보이겠지요.
그러나 글쓰기가 진행될수록 글을 쓰는 게 점점 힘들다는 것을 느낍니다. 건축물에 대한 글쓰기는 그 건물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와 그것을 보는 이의 감상이 어우러져야 합니다. 물론 건물에 대한 지식이야 인터넷 뒤지면 거의 다 나오지만, 그것에 대한 감상은 인터넷에 나오는 사진이나 그림으로는 안됩니다. 직접 가보고 느껴야 그것에 대한 감상이 나오는데, 안가보니 한계가 있는 겁니다. 많이 댕기고 많이 보고 많이 느껴야 좋은 글이 나옵니다.
얼마전에는 건축물중에 국보가 몇개나 될까? 어떤 건축물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을까? 라는 궁금증으로, 자료도 좀 찾아보고, 그래서 24점의 국보 건축물에 대해서 간략하게 정리였습니다. 사진도 붙이고 하니 A4용지 70매가 넘어갔습니다. 좀 뿌듯하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고 여태껏 여기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좀 부끄럽기도 하고 그랬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건축물 관련 자료를 찾다가 이런 책을 발견했습니다. 딸과 함께 떠나는 국보여행 크~~~ 그렇습니다. 나처럼 생각해서 벌써 답사도 다 가보고 그래서 책까지 만드신 분이 계셨습니다. 제목에 '딸과 함께'라고 시작되는 걸 보니 바로 그 냥반이셨습니다. 딸고 함께 씨리즈의 바로 이용재 선생. 그래서 이분의 블로그에 찾아 들어가보니 내가 머리속에 어렴풋이 써야 되겠다고 생각한, 그 모든 것이 들어 있었습니다. 전통건축에 대한 거의 모든 건축물에 관한 사진과 그의 글이 있습니다. 이 분야에서는 무림의 절대 고수 천마신군을 능가하는 내공을 가지신 분입니다.
근데 이 분이 돌아가셨댑니다. 급성패혈증. 향년 54세. 딸 24살. 아내 49살. 아아~~~~ 딸에게 줄 세우기만 하는 학교는 다니지 말아라고 강요했던, 글을 쓰려고 택시 운전까지 했던, 생전에 30권의 건축책을 쓰겠다던, 그리고 무엇보다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요하셨던 선생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셨습니다. 선생이 남긴 것은 건축에 관련된 풍부한 지식이나 감성도 물론 돋보이지만 인문학을 대하는 자세와 그런 생각들을 직접 실천하셨다는데 더 큰 가치가 있다는 걸 깨닫습니다. 선생의 책은 '딸과 함께 떠나는 건축여행 1권'밖에 읽지 못했습니다. 선생의 책은 벌써 열여덟권의 책이 나와있는데....
선생의 블로그입니다. 열심이 읽고, 가서 보고, 직접 느끼고 해서 인문학적 소양을 열심히 키우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도 잘 가르치겠습니다. 주위 사람들에게도 알리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좋은 집이란 어떤 집일까요? 여름에 시원한 바람이 살랑살랑 들어오고, 겨울에는 해가 방 깊숙한 곳까지 비추고, 집에서 바라보면 시원한 풍광이 있고, 마당이 있고, 난방비 많이 안들어가고, 유지 관리도 편하고, 가끔씩 필요한 나만의 공간이 있는 집.... 제가 생각하고 있는 좋은 집에 대한 여러 조건입니다만.... 적고 보니 이거랑 비슷한 집이 있습니다. 우리 한옥이 그렇습니다. 머 한옥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우리 대감님들이 살던 옛집은 위의 조건이 딱 들어맞습니다. 사실 머 대감님 집이야 돌쇠도 있고 마당쇠도 있고 삼월이도 있으니, 유지 관리에 별 어려움이 없었을 거긴 합니다만.... 대청마루에 누워 낮잠을 한잠 때리고 싶은, 툇마루에 앉아 햇볕을 쬐고 싶은, 처마의 낙수소리를 듣고 싶은, 사랑채에서 막걸리와 수육을 한 그릇 하고 싶은, 별채에서 어느(?)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싶은.... 그런 아름다운 한옥의 옛 살림집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 고난과 역경의 시간을 견뎌낸 역사의 산실 - 안동 임청각
임청각의 별당인 군자정.
고성 이씨의 종가집으로 정자까지 딸린, 현존하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살림집, 보물 182호 인터넷에 임청각을 치면 이렇게 나옵니다. 근데 고성 이씨??? 이런 이씨도 있었나??? 또 찾아봅니다. 전주 이씨 238만명, 경주 이씨 122만명, 성주 이씨 15만명, 광주 이씨 14만명, 연안 이씨 12만명, 고성 이씨 딸랑 8만명..... 근데 이 집의 내력을 보면 딸랑 이라는 말이 안나옵니다.
임청각은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정승의 아들래미가 '야~~ 여기 경치 좋구나.... 뒤에는 영남산이 있고 앞으로는 낙동강이 굽이굽이 흐르고.... 나 여기서 살랜다!!!' 하고 터를 잡고 손자가 지은 집입니다. 원래 99칸에서 일제가 마당에다가 기차길을 놓는 바람에 현재 70여칸으로, 강릉 선교장과 함께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기도 하지만, 규모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이전에 제대로 지어진 건물입니다. 일제의 장난이 아니었으면 대문의 2층 누각에서 낚시대를 드리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호인 임청각은 '臨淸流而賦詩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노라' 라고 하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임臨자와 청淸자를 따서 지었는데요, 집의 주변 환경과 잘 맞아 떨어지지만 후대에 아주 비극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지의 경사가 급하고 강가에 바짝 붙어있는 관계로 옆으로 아주 긴 독특한 평면구성이 되었다. 오른쪽에 대감마님집의 별당으로 양반집 정자 건축의 표본인 군자정이 있고 연못을 지나 언덕위에 사당이 있다. (현재는 이 사당에 위패가 없다. 뒷동산에 묻어 놓은 걸 아직도 못 찾았나 보다....) 안마당, 사랑채마당, 행랑채마당, 대문진입마당, 헛간마당 등 다섯개의 마당을 두어 여유있는 공간을 만듦과 동시에 남여와 계층을 구분하는 공간으로 위계질서를 분명히 하였다. 유홍준 선생은 답사기 책에서 이 집의 공간구성에 대해서 훌륭하다고 하셨습니다. 외용상의 권위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한옥의 온화한 정취도 함께 살려내는 데 성공했다. 같은 대갓집이면서도 경주 안강 양동마을의 여강 이씨 향단이 사랑채, 안채, 행랑채를 한 몸체로 엮어서 여백의 묘를 살리지 못했던 것을 생각할 때 임청각의 마당 운용은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나의문화유산답사기 3 중>
조선 말기의 임청각의 주인은 석주 이상룡 선생이었는데요, 의병운동에도 참가하시고 막 그러다가 1910년에 나라가 망하자 '공맹은 시렁위에 올려 놓고 일단 나라부터 구하자' 라고 분연히 일어섭니다. 데리고 있던 노비들은 노비문서를 모두 불태우고 '너거는 인자부터 독립군이다' 라고 해방시키고 나라를 되찾을 때까지는 제사도 어려우니 조상들의 위패는 모두 뒷산에 묻어버리고 일가 모두를 데리고 중국 간도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는 고난의 길을 택합니다. 그리고는 신흥무관학교를 운영하며, 부민단, 한족회, 서로군정서를 이끌었고 결국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현재 대통령)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좋은 세상을 못보고 1932년에 이국땅에서 돌아가십니다.
선생이 돌아가시고 후손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 집에 머물지는 못했습니다. 이상룡 선생의 아들 이준형씨는 안동의 어느 산골에 숨어 살다가 일제가 하도 괴롭혀서 '일제 치하에서 숨쉬는 것은 수치' 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합니다. 일제는 이 집에서 하도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나오니까 집 가운데로 철도를 놔 버립니다. 집의 반이 날라갔습니다. 썩을 넘들..... 그리고 옥중에서 해방을 맞았던 손자는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다 빨갱이로 몰리고 한국전쟁 당시 어린 자식들만 남기고, 울분과 고문후유증으로 돌아가십니다. 선생의 증손자들은 그래서, 자신의 뿌리도 모른채 한때 고아원 신세를 지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이게 쒸바 말이 됩니까???
이분이 석주 이상룡 선생이시다. 임청각의 영원한 주인 되시겠다.
선생의 아들과 손자가 일제의 호적제도를 거부해서 당시 친척 4명의 이름으로 등기를 시켰는데 이게 한 70여년 지나니까 소유자 한 70명 정도가 되어 버립니다. 선생의 증손자인 이항증씨가 이 소유권을 정리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있는데도 잘 안된다고 합니다. 나라에 기증을 할래도 소유권이 불분명해서 안된다고 하는 군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의 집이 광복 65년이 되도록 소유권 정리조차 안 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등기를 바로잡으려고 애쓰는 동안 온갖 모욕을 당했어요. 국민고충처리위원회, 법률구조공단도 가봤지만 찬밥 신세였어요. 변호사들도 소송을 안 맡으려 하고. 일만 많고 실익은 없기 때문이죠. 2003년 재판 시작하면서 관련자 68명에게 복사해서 보낸 서류만 5만5,000장이었습니다. 안동시와 경북도가 임청각에 석주 선생 생가라는 표지판을 세운 지 10년이 넘었는데, 국가보훈처는 지난해 5월에야 임청각을 현충시설로 지정해 줬어요. 소유권자가 신청해야 한다는 이유로요. 이래서야 누가 나라를 위해 싸우겠어요?"
크고 아름다운 집 임청각을 두고도 남의 집 처마 밑을 전전하고, 학교를 다니기 위해 여동생과 함께 고아원에서 자라야 했던 고초는, 그는 말하기 싫다고 했다. "역효과만 나지 않겠어요? 독립운동하면 저렇게 망한다고 할 것 아닙니까?" (출처 : 임청각 홈페이지)
去國吟 조국을 떠나며
山河寶藏三千里 더없이 소중한 삼천리 우리 산하여
冠帶儒風五百秋 오백년 동안 예의를 지켜왔네.
何物文明媒老敵 문명이 무엇이기에 노회한 적 불렀나.
無端魂夢擲全甌 까닭 없이 꿈결에 온전한 나라 버리네.
已看大地張羅網 이 땅에 그물이 쳐진 것을 보았으니
焉有英男愛髑髏 어찌 남자가 제 일신을 아끼랴.
好佳鄕園休悵惘 고향 동산에 잘 머물며 슬퍼하지 말지어다.
昇平他日復歸留 태평성세 훗날 다시 돌아와 머물리라.
이상룡 선생이 삭풍이 몰아치는 간도로 떠날 때 지은 시다. 임청각아 미안하다, 사랑한다, 금방 오께....군자정에 걸려있다. 아... 졸라 비장하다.
살림집 하나 소개하면서 '역사 바로 세우기' 까지 운운하는 것은 너무 오바인가요.... 하지만 정말 이런 것은 바로 잡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강에 삽질할 시간과 돈으로 이런 것 부터 해야 했었습니다. 씨발 맹바기 욕을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다. 우째 그래 다른 사람 말을 듣지를 않노...앞선 이용재 선생이 누누히 강조하던 선비정신,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제대로 실천한 집입니다. 배운 사람이 더 하고 가진 사람이 더한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간 되시면 한번 가시죠. 사랑채 툇마루에 앉아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맛난 대추차 한잔 하시면 그 운치를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임청각 앞에 있는 법흥동 7층 전탑도 보구요. 요즘은 임청각에서 고택체험으로 숙박도 가능하댑니다. 행랑채는 5만원, 안채 10만원, 군자정 15만원. 거국음의 현판이 걸려 있는 군자정에서 하룻밤 보내면 아마도 선비정신이 확 들겁니다. 예전에 갔을 땐 그저 큰 대감님 집이었는데, 이제 다시 간다면 눈에 보일 것이 많을 것 같습니다. 애들이랑 꼭 가봐야 되는 곳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2. 한 폭의 그림 같은 배경에 그림 같은 집 - 구례 운조루
타인능해 他人能解 : 누구라도 능히 열 수 있다.
어제 TV에서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확정 되었다고 한참 방송을 했었습니다. 김훈의 그 남한산성이 맞습니다. 청나라가 쳐들어 오자 인조가 졸라 도망가서 숨어지내던, 그리고 그 안에서 최명길과 김상헌이 항복하자, 싸우자, 우리끼리 박터지게 싸웠던, 그래서 결국은 남한산성에서 나와 오랑캐로 여겼던 넘들한테 왕이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의식을 했던, 참 먹먹한 소설 남한산성의 그 남한산성입니다.
류이주라는 냥반이 있습니다. 이 양반이 조선 영조때 무관에 급제해서 수도방위사령부에서 근무했는데, 남한산성 보수 및 증축공사 현장의 소장으로 나갑니다. 낙안군수 시절에는 낙안읍성 공사에도 소장을 맡았습니다. 그러다가 산수갑산으로 막 귀양도 가고 하다가 은퇴하고 여기에 내려와서 집을 짓습니다. 손수 설계하고 시공은 조카가 맡아서 짓습니다. 그래서 완성한 것이 구름속에 새처럼 숨어사는 집 운조루입니다.
운조루 앞에서..... 어느듯 다 자라버린 우리 딸......
입구의 솟을 대문입니다. 역쉬나 대감집 같다. 다만 입구 표지판에 입장료 1000원이라고 적혀있는데, 어디 식당의 메뉴판도 아니고..... 저 남루한 간판이 우아하고 품위있는 고택의 품격을 다 떨어뜨린다고.....
이용재 선생은 만원짜리 주고 거스름돈 받지 말랜다. 그 정도의 가치는 있다고.
큰 사랑채인 운조루雲鳥樓이다. 雲無心以出岫 구름은 무심히 골짝을 돌아나오고 鳥倦飛而知還 새는 날기에 지쳐 우리로 돌아오네.... 그래서 운조루이다. 새가 구름에 숨듯 숨어 사는 집.
주인이 사용했을 돌계단이 보인다.
멀리 보이는 것이 계족산이다. 약간 높은 곳에 올라서면 좋은 조망을 확보할 수 있다.
큰 사랑채에 오르는 입구. 이 집의 뷰포인트다. 집을 설계하고 지은 사람이 무관이며 성곽을 쌓은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라 집도 그런 느낌을 받는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五美里.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고 땅이 기름지며 인심이 후한 곳이라 오미리.... 이름부터 심상치 않은 동네입니다. 풍수지리로 보면 선녀가 퇴근하다 실수로 금가락지를 떨어뜨렸다는 금환락지의 명당자리가 바로 이곳이랩니다. 머 굳이 풍수지리나 민속책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운조루에서 보는 오미동 들판은 풍요롭고 따뜻하고 푸근합니다.
전라도는 땅이 비옥하고 넓은 평야지대의 생활 환경에 맞게 ㅡ 자 집이나 ㄱ자 집이 많다. 운조루는 집을 지은이가 경상도 사람이라 경상북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ㅁ자 집이다. 총 73칸의 큰 집이다. 보통 일반 백성의 집은 세칸짜리 집이다. 방 두개에 부엌하나. 우리집도 세칸짜리 집이였다. 99칸짜리 집이라면 방이 99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 칸이라는 것은 기둥과 기둥사이를 칸이라고 한다. 보통 아홉자다. 한자가 30cm이니, 한칸이라 함은 보통 두평이 좀 넘는 공간이다.
운조루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타인능해의 뒤주입니다. 쌀 세가마니가 들어가는 큰 뒤주를 두어 굶주리는 마을 사람 누구라도 퍼 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혹시나 퍼가는 사람이 미안해 할까봐 사람 안보이는 곳에 놓았다고 합니다. 밥 짓는 연기가 마을 사람들에 보이지 않도록 굴뚝도 아주 낮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우리 옛 사람들의 전통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이 막 퍼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될 수 있으면 자제하고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양보했다고 합니다. 뒤주를 개방한 운조루나 개방한 뒤주를 열지 않으려고 애쓰는 마을이나 다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월말에 시어머니가 이 뒤주를 열어보고 쌀이 남아 있으면 며느리가 혼났다고 한다. 빌게이츠가 전 재산을 기부단체에 기부하고 자선활동을 하고 있는데 사실은 우리도 이런 거 많았다.
햇살이 툇마루를 데우고 있다. 앉아서 졸고 싶은 마루다.
누워서 햇살 맞으며 낮잠 자고 싶은 마루
낮잠 잘라고 폼 잡는 우리 막내......
큰 사랑채인 운조루의 서까래. 설계자는 군인이지만 미적 감각이 풍부했나보다.
지리산 닷컴에 올라와 있는 운조루의 사진중에 가장 맘에 드는 사진이다. 그냥 평화롭고 푸근하고 그런 기분이다.
덧붙여, 좋은 사진을 출처만 밝히면 자유롭게 퍼 갈수 있도록 한 지리산 닷컴에 감사드린다.
운조루 10대 손 유홍수 씨가 자신의 들을 걷고 있는 사진이다. 그는 이 운조루의 주인이기도 하지만 이 동네의 평범한 농사꾼이기도 하다.
외지 사람들은 운조루라 부르고 마을 사람들은 아흔 아홉칸 집이라 부릅니다. 집이 있는 곳은 오미동이고, 여기 이 집에서 10대 240년을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평범한 시골에 평범한 농부가 살고 있는 집, 그러나 그 집에 깃든 정신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가서 보고 걷고 산책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집, 운조루입니다.
3. 아주 독특한 보물 살림집 - 상주 양진당
선비의 일거리는 책을 읽는 것입니다. 그럼 얼마나 읽어야 선비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공자는 삼만권의 책을 읽었답니다. 자칭 선비인 이용재 선생은 삼천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열심히 읽어서 일주일에 두권 정도를 읽는다고 치면 일년에 백권, 음... 그러니까 일주일에 두권씩 삼십년간 읽으면 삼천권이 됩니다. 저도 한때 만화방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는데.... 그 만화책까지 다 치면 한 삼천권은 되지 않을까요....ㅋㅋㅋ
상주에 있는 이 독특한 살림집은, 살림집에도 불구하고 보물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우리나라 한옥계에서 한자리를 차지하는 건축물입니다.
상주 양진당은 풍양 조씨 검간 조정(1555~1636)이 지은 집입니다. 이 냥반의 스승이 서애 류성룡 선생이었는데 제자를 위해 중매를 섭니다. 류성룡은 자기와 함께 퇴계선생의 수제자로 꼽히는 학봉 김성일의 조카를 소개시켜 줍니다. 네, 일본에 파견 갔다와서 '맘 푹 놓으시라요, 쪽바리넘들 절대 안쳐들어와요' 라고 거짓 보고했던 그 김성일이 맞습니다. 학봉 김성일은 안동에서 의성 김씨로 대단한 세력을 누리고 있는 터라 조정은 '오~~ 땡큐' 하면서 의성 김씨 규수집 딸을 아내로 맞습니다.
그러다 임진왜란이 터지고 조정은 사재를 다 털어서 의병을 일으킵니다. 상주 최초의 창의군입니다. 그러다 자기보다 총 잘쏘는 고향 후배를 만나 쫄병과 총칼을 모두 넘기고 자신은 자기가 잘 할수 있는 펜을 듭니다. 그리고 6년가의 임진왜란의 상세한 기록을 남깁니다. 바다에서 일어난 임진왜란을 기록한 것이 난중일기이고 육지는 조정의 <임진란 기록>입니다. 선생의 후손들은 1995년에 이 보물 1003호를 상주박물관에 기증합니다. 난중일기는 들어봤는데 임진란 기록은 첨 듣는걸.... 역시 1등만 기억하는 세상 여하간 대단한 집안입니다.
오십 가까운 나이에 사시합격, 검사로 생활하다 이괄의 난, 정묘호란 때 왕과 함께 피신도 다니고 하다가 조달청장까지 벼슬이 오릅니다. 그리곤 은퇴, 안동의 처가집으로 와서 99칸의 한옥을 물려 받습니다. 역시 마누라를 잘 만나야..... 근데 에잉~~ 처가 살이가 머냐~~~ "야. 다 뜯어. 뗏목에 싣고 상주로 간다!" 그래서 상주군 낙동면 승곡리에 다시 짓습니다. 짓고 나서 당호를 지어야 되는데..... "스승님 집 당호가 머냐?" "양진당입니다." "그래? 그럼 우리도 그걸로 해" 상주의 양진당이 탄생합니다.
저기 양진당의 현판이 보인다. 진리를 키우는? 가르치는? 집이다. 안동 하회마을에 가면 역시 보물로 지정이 되어 있는 또 하나의 양진당이 있는데 서애 류성룡의 형인 겸암 류운룡의 집으로 풍산 류씨 종가이다. 아버지의 호를 따서 입암고택이라고도 한다.
본래 아흔 아홉칸의 큰 집인데 지금은 안채인 양진당만 남아 있습니다. 이 집... 좀 특이합니다. 집을 지을 때 조정이 여러가지 주문을 많이 했나 봅니다.
"야.... 집을 좀 띄워라.... 조망 잘 보이게...."
"마루는 졸라 크게 만들어.... 엥간하면 친척들 다 모여서 막걸리 한 사발 하게...."
"땅은 모나고 하늘은 둥글다.... 이게 세상 원리의 가장 기본이다. 알았냐?? 기둥은 아래는 모나게 위는 둥글게!"
"고방(창고 방)은 양상군자가 못 들어오게 안방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도록 혀...."
양진당의 첫번째 사진을 보면 상당히 들려 있다. 그래서 누마루 생겼는데 이 또한 일반 살림집에서는 거의 없는 구조다. 방으로 들어가려면 이처럼 계단으로 올라가야 된다.
기둥을 잘 보면 아래는 사각형, 위는 원형이다. 옛날에는 건축가가 다 선비다. 건축사?? 머 이런 거 없었다. 설계는 선비가 하고 목수 불러서 집 짓고..... 그래서 자기가 공부했던 이치를 집에 적용시켰나 보다.
지붕을 앞으로 더 달아내기 위해 서까래를 이렇게 이중으로 하는 것을 겹처마 집이라고 한다. 구분하기 위해 안쪽 서까래는 서까래, 바깥쪽 서까래는 부연이라 부른다. 보통의 경우 서까래는 원형으로, 부연은 사각형으로 하는데, 이 집은 특이하게 모두 사각형이다. 옛날에 학교 댕길 때 우리 서까래는 둥글고 일본 서까래는 사각형 이라고 배운 기억이 문득 난다.
친척들 모두 모여서 제사도 지내고 삼겹살 파티도 하려고 넓게 만든 대청. 이거 내 생각이 아니고 이 집에서 나온 문서에 그런 기록이 있댄다. 진짜다.
풍양 조씨 집안에서 출세한 사람들 사진을 걸어 놓았다. 마지막 사진은 조순 아저씨다.
상주 양진당은 일반 살림집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서원이나 관아같은 느낌이 나는 건축물입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좀 건조한 느낌입니다. 근처에 있는 풍양 조씨의 또 다른 종택인 오작당과 비교해 보면 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는 풍양 조씨 연수원으로도 쓰인다고 하니 오히려 건물이 제 역할을 찾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용재 선생이 물었댑니다.
"할배요... 보물로 지정이 되면 머 쫌 좋은거 있능교??"
"월 관리비 백만원 나온다"
"그거 말고는요?"
"없다"
후손 4명이 살아가면서 관리하고 경비하고 하는데.... 겨우 밥값 정도만 나온댑니다. 문화재청 일년 예산이 4천억입니다. 강바닥에 쏟아 부은 돈 20조입니다. 아... 또 맹바기 욕을 하고 싶어집니다.
4. 여러대에 걸쳐 모범이 되는 선비의 집 - 함양 일두 고택
성균관 대학교에 가면 문묘라고 해서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는데, 이 문묘에는 공자 뿐 아니라 우리 역사에서 성리학쪽으로 진짜 공부를 잘한 선비들의 위패도 모셔져 있습니다. 여기에 뽑히면 본인은 물론 가문의 영광이라고 하는데요, 동국 십팔현이라고 해서 열여덟명의 선비들이 여기에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근데 이거 좀 싱겁습니다. 왕중왕을 가립니다. 그래서 그 중에서 진짜 공부 잘 한 다섯명을 뽑습니다. 이를 동방오현東方五賢이라고 하는데요.....
서흥 김씨 한훤당 김굉필
하동 정씨 일두 정여창
한양 조씨 정암 조광조
여주 이씨 회재 이언적
진성 이씨 퇴계 이황
아.... 동국십팔현 중에서 저기에 못 끼시고 아깝게 탈락하신 분을 보니까 포은 정몽주, 우계 성혼, 율곡 이이, 고은 최치원.... 머 이런 분들이 계시는 군요..... 응?? 근데 퇴계선생의 학문적 라이벌이라고 불리는 남명 조식 선생이나 병산서원의 서애 류성룡 선생, 훈구파 사림파 할 때의 그 사림파 대부인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아예 동국 십팔현에도 못 들었습니다. 머 그렇댑니다. 근데 이거 누가 뽑았지???? 무슨 기준으로 뽑았나 모르겠네.....
옛 건물들을 보러 다니면 한번쯤 부딪히는 이름인데요, 퇴계 선생의 도산서원이야 말 할 것도 없구요, 한원당 김굉필은 도동서원, 회재 선생은 양동마을, 독락당, 그리고 안강 옥산서원이 떠오르구요, 일두 정여창 선생은 남계서원, 악양정, 그리고 이번에 살펴 볼 일두 고택의 주인공입니다.
함양 개평마을. 개평을 후하게 주나??? 일두 고택을 필두로 오담 고택, 풍천 노씨 대종가, 노참판댁 고가, 하동 정씨 고가 등 유서 깊은 한옥들이 말 그대로 즐비한 동네이다.
고택 주위의 돌담길..... 정겹다.
일두 고택의 솟을대문. 대문안에 뭔가 많이 붙어 있는데......
정려라고 하는 게 있는데..... 충신이나 효자, 열녀가 나온 집안에 나라에서 주는 붉은 바탕에 흰 글씨의 일종에 표창장이다. 저거를 대문에 하나 걸어 놓으면 쫌 하는 집안이여~~ 라는 표시가 된다. 옛날에 저런 거 하나 받을 라고 살아 있는 과부 며느리를 죽이고 그랬다능..... 그런데 그게 다섯개 씩이나 붙어 있다. 전국을 통틀어서도 다섯개 붙은 집안은 없다고....
양반 동네 하면 의례 안동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좌 안동 우 함양' 이라는 말이 있듯이 함양도 안동 못지 않은 뼈대있는 동네인데요, 성리학의 대가이자 동방오현 중의 한 사람인 정여창 선생의 고향인 함양 개평마을에 가면 안동 하회마을이나 경주 양동마을 못지 않은 많은 한옥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일두 고택은 개평마을 중앙에 있습니다.
정여창. 호는 일두一蠹 응?? 한마리 좀?? 호를 이 따위로?? 좀이 오랜 시간에 걸쳐 나무를 갉아 대듯 그렇게 오랜 시간을 두고 학문을 하겠다... 과거 준비 중에 모친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치르고 지리산 밑에 악양정를 짓고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그러다 41살에 과거 급제. 당시 임금인 성종은 정여창의 학문이 졸라 높음을 바로 알아보고 왕세자인 연산군의 과외 선생으로 임명. 그러나 연산군은 꼴통입니다. 그래도 가르칩니다. 그러다 스승인 김종직 선생도 죽고.... 에이~~ 나 안할래~~ 고위공직은 사표내고 함양군수로 부임합니다.
1498년 조선 4대 사화의 첫 사화인 무오사화가 일어납니다. 이 사화라는 것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 지금의 딴나라당이랑 똑 같은 거죠 와 공부 잘하는 사람이 높은 벼슬을 해야지 라고 주장하는 사림파와의 싸움입니다. 그냥 싸움이 아니라 목이 뎅강 날라가는 그런 살벌한 싸움입니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함양군수로 시작해서 법무부 장관을 지낸, 학문이 아주 높은 냥반입니다. 제자들도 많습니다. 김굉필, 정여창도 이 양반의 제자입니다. (조광조는 김굉필의 수제자고 이언적의 선생 역시 김종식의 제자 중 한사람인 손중돈이라는 선비니, 동방오현 중에 네명이 제자인 셈이 되는 군요. 과연 사림파의 중시조라 불릴 만 합니다.) 김종직이 단종은 착하고 착한 단종을 죽인 세조는 무지 나쁜 넘이다.... 라는 글을 적었었는데.... 요거슬 꼬투리 잡아서, 과거에 졸라 많이 급제해서 힘을 키운 사림파에게 쫄아있던 훈구파가 연산군에세 꼰지릅니다.
"저기여~~ 김종직이 당신 할배를 조카를 죽인 패륜아 라고 썼대여~~~"
"머라~~~ 씨발 사림 다 죽여!!"
그래서 이미 죽은 김종직은 부관참시. 졸라 많은 김종직 제자들 다 능지처참..... 정여창은여?? "한 때는 내 선생이었으니 죽이지는 말고, 곤장 3백대에 3천리 밖으로 유배 보내!!" 그래서 정여창은 함경도 종성에서 7년간 유배생활 끝에 결국 돌아가십니다. 정여창의 같은 반 친구였던 김굉필은 정여창이 죽던 해에 연산군의 생모에 대한 복수극인 갑자사화로 사형. 죽은 정여창은 또 한번 더 죽고.....
일두고택의 사랑채. 충효절의 라고 적힌 현판 흥선대원군이 썼다고 하나 검증은 안된 이 있다.
기둥 하나하나에 세월의 흔적이 있다. 충효절의 현판이 보인다. 충성, 효도, 절개, 의리.
그런 현판의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여전히 장난꾸러기......
사랑채에서 본 정경
그러나 권불십년. 1506년 중종반정 이후에 억울하게 죽은 일두 선생은 다시 복원됩니다. 정 1품도 되고 우의정도 되고. 명예회복 하신 거죠. 머 인혁당 사건 같은 그런 케이스입니다. 그리고 50년 후에는 명종이 사액을 내려 일두 선생을 기립니다. 소수서원에 이어 남계서원은 두번째 사액서원이 되었습니다. 후손인 정덕대라는 냥반이 일두 선생 서거 100주년을 맞아 이 개평마을 3000평 대지에 제대로 된 양반 대궐을 짓습니다. 이것이 일두 고택입니다.
탁청재. 마음을 깨끗이 하는 곳???
여기는 안채..... 마당이 따스하다.
따뜻한 것은 마당 뿐이 아니라, 안채의 분위기 자체였다.....
옛날에 최수지가 서희 역할로 나왔던 토지의 촬영지이며, (봉순이 역할로 나온 전미선을 보고 가슴 설레 했었는데.....ㅎㅎ) 다모도 여기서 촬영했다고 합니다. 일두 고택 앞에는 하동 정씨 집안의 비법이 500년 동안 전수 되어 온 솔송주를 파는 곳이 있으니 잘깐 들러는 것도 좋은 듯 합니다.
일두 선생의 종손은 은행장 퇴직하고 일두 고택 근처에 한옥을 짓고 안빈낙도 하고 계시답니다. 근데 솔로로 내려오셨댑니다. 밥도 자체 해결하고 계시고..... 요새 부인과 같이 낙향하면 기네스북에 오를 만 하다는 군요.....ㅋㅋㅋ
일두 정여창 선생.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에 대해, 훈구파? 나 안쫄아! 할말은 해야지!!! 하는 선비입니다. 그래서 이 집도 꼿꼿한 선비정신이 그대로 드러나는 집입니다. 문헌세가文獻世家 여러대에 걸쳐 모범이 되는 선비의 집이라 부를 만 합니다.
5. 한국 최고의 전통가옥 - 강릉 선교장
태종 이방원의 첫째 아들 양녕대군은 한량 중의 한량입니다. 공부 싫어하고 친구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특히 여자 좋아하고.... 이거는 내랑 똑같네 '나 왕 같은 거 싫어! 술과 여자가 좋아.....' 태종이 왕 해라고 꼬시다가 결국 포기합니다. 둘째 효령대군. 양녕이 효령한테 갑니다. '나 왕 안 할거야.... 너는 어쩔래??' 효령 왈 '나도 안 할래..... 부처님이랑 놀거야!' 결국 책만 읽던 세째 충녕대군에게 왕위가 물려집니다. 이 분이 세종대왕입니다.
세종의 작은 형 효령대군은 부처님이랑 놀아서 그런지 오래 삽니다. 형 양녕 사망, 동생 세종 사망, 조카 세조 사망, 조선 8대왕 예종 사망..... 너무 오래 삽니다. 성종 쯤 오니 족보가 하도 높아서 파악도 잘 안됩니다. 91세 사망. 유언은, 될 수 있으면 벼슬 하지 말고, 한양을 떠나서 살아라.....
효령대군의 11대손 이내번이 효령의 유언을 실행에 옮깁니다. 가지고 있는 땅을 모두 현금화합니다. 선대 왕들이 미안해서, 그리고 어른이라서 조금씩 주었던 게 다 모아보니 엄청납니다. 그걸 가지고 강릉의 선교리에 와서 99칸의 집을 짓습니다. 선교장입니다.
강릉 선교장은 입구에 있는 조선 민가 정원의 최고라 할 수 있는 활래정 '다시 힘차게 살아나는 정자' 로부터 시작한다. 창덕궁의 부용정에 비길 정도이니 머...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선교장 전경. 양반네 집들이 다 그러하듯 선교장도 족제비들이 이내번을 인도해서 여기다 지으라는 암시를 했다는 전설이..... 여하간 명당자리다. 99칸으로 지어졌고 일부 소실되어 지금은 84칸이 남아있다. 조선시대는 집 크기가 엄격하게 규제되었다. 대군 60칸, 군과 공주 50칸, 옹주와 장 차관급은 40칸. 중전이 낳은면 대군, 공주. 무수리가 낳은면 군, 옹주.....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도 첩의 자식라는 소리다.이내번은 종이품이라 40칸이지만, 조선 후기에 와서는 99칸까지는 봐줬다.
거대한 행랑채가 압권이다. 하인이 묵던 곳이다. 지금은 관광객이 묵을 수 있다. 그럼 하인 취급인겨??? 한창 때는 하인이 1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줄행랑을 치다의 그 행랑이다.
솟을대문에 있는 현판. 선교유거 船橋幽居 신선이 묵는 그윽한 집. 종이품 이상이 타던 수레 초헌이 들어갈 수 있게 하려고 지붕을 높였다. 선교장 장莊자가 붙어면 묵어 갈 수 있는 곳이다.
선교장은 300명이 한꺼번에 밥을 먹을 수 있는 그릇을 갖춘, 지금으로 치면 별 다섯개 짜리 호텔입니다. 강원도를 방문한 선비들은 모두 선교장에서 자고 갑니다. 대지만 3만평입니다. (지금은 만평). 하도 부자라 주문진과 묵호에 곡식 창고를 따로 만들었댑니다. 강원도땅이 모두 전주 이씨 껍니다. 그럼 강원도 여자도 모두? 여하간 만석꾼이었댑니다.
선교장 스위트룸 사랑채인 열화당. 가까운 벗들의 정겨운 이야기를 듣는 집이다. 저 기둥 어딘가에서 본 듯 하다고? 그렇다. 사바친이 설계한 고종의 전용 커피숍 덕수궁 정관헌 기둥과 비슷하다. 조선 왕실 전속 러시아 설계자 사바친이 여기서 하룻밤 묵고 숙박비로 러시아풍 처마와 기둥을 만들어 주고 갔다. 어디까지 가봤니? 6 - 졸라 가려 뽑은 등록문화재 30선의 정관헌 편을 참조하시면 되겠다.
강릉 선교장은 조선 말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민가입니다. 사랑채, 안채, 행랑채, 별당, 정자, 곳간채, 사당 등이 모두 제대로 갖추어진 살림집입니다. 별당은 동별당 서별당으로 나누어 지을 만큼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대문만 12개입니다.
2000년 KBS 왈 '선교장은 대한민국 최고 한옥이다'
안채 우측의 동별당. 오은고택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내번 대감의 손자 호가 오은이라고.... 주로 집안 손님들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집안의 도서관이자 교실인 서별당. 집이 하도 커서 자체 도서관과 교실도 있다.
이씨 가문의 큰 살림을 맡은 여인들이 거처하는 안채. 안방마님은 한 목소리 낸다. 왜? 고방열쇠와 뒤주열쇠를 가지고 있으니까. 서방님도 터치 못한다. 예나 지금이나 경제권을 쥐고 있어야 큰 소리 칠 수 있다. 우리 마눌님은 경제권 이런 거 상관없이 큰 소리 치신다.
하얀 회벽이다. 낙서 하고 싶은.... 담에 기대어 낙수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재미있겠다 싶다.
중국 전통 건축물은 '나는 이렇게 부자고 힘이 세다' 는 오만한 느낌을 준다. 일본 전통 건축물은 너무 깔끔해서 정이 가지 않는다. 이에 비해 한옥은 부드러운 곡선이 '어서 오세요' 하며 따뜻하게 맞아주는 듯한 포근함이 감지된다. 그래서 한옥을 고려청자만큼, 유럽의 모나리자 그림만틈 중요한 보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 피터 바톨로뮤
6.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의 예술혼이 서린 곳, 해남 윤씨의 보물창고 - 해남 녹우당
아... 쫄았습니다. 엥간하면 안 쪼는데.... 쫄고 말았습니다. 눈매가 무섭습니다. 수염도 좀 무섭고.... 윤두서라는 냥반인데.... 누군지 모르시겠다구요? 저도 몰랐습니다. 어부사시사로 유명한 고산 윤선도 선생의 증손자랩니다. 근데 이 이분이 화가시랩니다. 조선시대에는 자화상은 잘 안그렸다고 그러는데 이 분은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그렸습니다. 잘 그렸습니다. 국보입니다. 근데 어디서 본 것 같다구요???
수염이 똑같네.....ㅋㅋ
윤두서가 자화상을 그린 곳, 그리고 이 자화상을 보관하고 있던 곳이 해남 윤씨 종가가 있는 녹우당입니다. 윤두서가 이 자화상을 그린 시기는 조선왕조가 조금씩 기울어가고, 영남 사림을 제외하고는 벼슬에 나가려고 해도 잘 안되고, 그래서 나가기도 싫은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이 자화상은, 비록 전라도 땅 끝자락에서 그림이나 그리고 있지만 대장부의 기개는 살아있다..... 나 아직 안죽었어!!! 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 그림은 해남의 윤선도 유물전시관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녹우당에서 나온 어마어마한 보물들을 전시한 곳인데요, 2010년에 개관했습니다. 참 잘 지어졌댑니다. 그래서 2011년 한국건축문화대상 사회공공부문 대상을 받았습니다. 설계자를 찾아보니 금성건축 김상식, 김용미 라는 분입니다. 설계자는 상을 탄 것 보다 더 기쁜 것은 고산 선생의 14대 종손인 윤형식씨가 결과에 아주 만족한 것이라고 겸손하게 말합니다.
"마을 곳곳에 자리잡은 집의 형태, 대지, 산과 연못의 배치 등 모든 것들이 전통적인 요소를 간직한채 안정적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걸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이 관건이었다" 이런 생각 아래 지어진 전시관은 혼자만 오롯이 잘난 주인공적인 건물이 아니라 마을의 조화로움을 한층 높여준 건축물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엥?? 웬 신윤복의 미인도가??? 가 아니라 윤두서 선생의 손자인 윤영의 미인도이다. 미인도 그림이 다 비슷한 걸 보면 옛 미인은 다 저렇게 생겼나 보다. 천창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빛에 비친 이 미인도의 모습은 절묘하다고.... 당장 가서 보고싶다. 나 미인 좋아한다.
고기나 잡고 땔나무나 하며 은둔하겠다는 뜻의 호를 가진 어초은 윤효정이 1501년 해남읍 연동리 2만평에 집을 짓고 안빈낙도합니다. 녹우당의 전신입니다. 어초은의 후손 고산 윤선도(1587~1671)는 10대에 시험에 붙어 공무원이 됩니다. 공부 되게 잘했나 봅니다. 광해군 오른팔이 이이첨과 한판 붙습니다. 31살에 함경도로 유배됩니다.
그러나 곧이어 인조반정. 쿠데타는 성공합니다. 임금인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되고, 이이첨 사형. 가족 모두 멸족. 윤선도는 6년만에 복귀. 그러다 왕세자인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됩니다. 피곤해서 낙향. 해남으로 옵니다. 51세에 병자호란이 납니다. 인조 남한산성으로 피신. 원손대군 강화도로 피신. 제가 갑니다. 쫌만 기둘려..... 배에다 의병싣고 강화도로 갑니다. 가보니 벌써 함락. 에잉~~~ 제주도 가서 더러운 꼴 안보고 살랜다. 제주도 가다가 보길도에 들릅니다. 아름다운 섬입니다. 농사도 잘 되고. 정착합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다시 연락옵니다. 유배! 이유는? 왕이 오랑캐에서 머리 조아렸는데 집에 가만히 있었다고.... 아닌데요, 강화도꺼정 배타고 갔슈!! 본 사람 없음. 유배! 또 유배 갑니다. 그러다가 제자인 봉림대군이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됩니다. 효종입니다. 언넘이 우리 사부 유배 보냈어?? 효종은 수원에 집을 하사합니다. 그러나 윤선도는 다시 보길도 부용동으로 옵니다. 이젠 정말 조용히 살래... 조선 3대 아름다운 민간 정원이라 불리는 세연정을 짓습니다. (어디까지 가봤니? 울나라 건축물 1 - 3대 정원, 4대 누각, 5대 서원 편 참조) 우리 동네 고깃집 이름도 세연정이다. 이번 휴가에 세연정 함 가까 했더마 마눌이 고기 먹으러?? 라고 대답했다...
효종이 죽습니다. 윤선도 다시 유배갑니다. 이젠 정말 지겹습니다. 82세에 수원 집을 뜯어 배에 싣고 해남으로 내려와서 고향집 안채 앞에 사랑채를 다시 짓습니다. 현판을 답니다. 녹우당. 그러곤 부용동에 다시 들어가 생을 마감합니다.
녹우당 앞 은행나무. 녹우당의 마스코트다. 녹우당 들러 본지 하도 오래 되어 다른 건 기억이 안나도 은행나무는 기억이 난다. 효종임금이 자기의 사부에게 하사한, 임금의 사랑이 담겨 있는 집이다.
녹우당. 녹색 비가 내리는 집??? 뒷동산의 비자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소리를 녹우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역시 감각 있으신 분이다. 녹우당은 해남 윤씨 종가의 종택이다. 이 집 안채에는 아직도 고산의 14대 종손이 거처하고 계시다.
추사가 녹우당을 찾았다. 어라~ 이 집 장난 아니네~~. 하루 자고 가면서 숙박비로 현판을 하나 써 준다. 일로향실 一爐香室 한 개의 화로로 온 방이 향기롭다.
1697년 숙종이 충헌이라는 시호를 내립니다. 고산은 나라의 충성스러운 공무원이었다는 것을 나라가 보증하는 거죠. 고산 선생님 죄송합니다. 맨날 유배만 보냈던 조선 왕실을 용서하세요.... 그리고 1801년 다산 정약용이 신유박해로 유배옵니다. 윤두서 자화상의 주인공 공재 윤두서 선생의 손녀딸이 정약용 엄마입니다. 할매가 마중나옵니다. 야 녹우당으로 가자. 싫어요, 저 그냥 산으로 갈래요... 강진의 산속에 소박한 남향집, 다산초당을 짓고 책 읽기를 시작합니다. 할매, 녹우당에서 책을 산으로 보내줍니다. 혹시 언니도 필요혀? 정약용은 이 다산초당에서 실학을 완성하고 500여권의 책을 짓습니다.
녹우당에는 고산 사당, 어초은 사당, 추원당, 500년 된 비자나무 숲 등 볼거리가 많습니다. 특히 고산 사당과 어초은 사당은 불천위 사당입니다. 보통은 4대 봉제사까지 지내고 그 윗대는 묘사로 그냥 한꺼번에 지내는데 학문이 높고 공이 큰 인물은 나라에서 허락하여 사당에서 대대손손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한 것이 불천위 사당입니다. 불천위 사당 하나 있으면 가문의 영광이라는데 이 집에는 두개나 있습니다. 아주 드문 일이라고 합니다.
이 집의 가훈은 삼개옥문 적선지가 三開獄門 積善之家 가난해서 세금을 못내 감옥에 갖힌 백성들을 위해 어초은이 세금을 대신 내어 세번이나 꺼내줬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집안은 오래갑니다. 기부는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후손을 위한 것입니다.
고산 윤선도의 사당. 영조때 불천지위 不遷之位 로 지정되어 모셔지고 있다. 영구히 사당에서 제사를 모시는, 국가에서 그 공이 인정될 때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이다. 엉? 영구히 제사를 모신다고?? 여자들 이 집안에 시집 절대 안 오려고 하겠는걸....
연잎에 밥을 싸고 반찬은 준비하지 마라
닻 올려라 닻 올려라
삿갓을 이미 쓰고 있노라, 도롱이는 가져 오느냐
찌그덩 찌그덩 어여차
무심한 갈매기는 내가 절를 좇아가는가, 제가 나를 좇아오는가?
- 어부사시사 중에서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의 예술혼이 있는 곳, 한 가문에서 나온 국보와 보물과 유물 3000여점이 있는 곳, 그리고 그 보물들을 고스란히 간직해 왔던 집이 있고, 명품 돌담길과 산책로가 있고, 비자나무 숲과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곳. 해남 윤씨 보물창고, 녹우당입니다.
7. 한국인의 심성을 가장 잘 표현한 살림집의 백미 - 정읍 김동수 가옥
소박한 구조와 건축가의 독창성, 조선후기 사대부 가옥의 중후한 모습을 원형대로 잘 유지하고 있다 - 문화재청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에 있는 김동수 가옥은 6대조인 김명관(1755~1822)이 한양에서 내려와 청하산 아래에 명당을 골라 10년 동안 지은 집입니다. 1784년에 건립이 되었으니 지금 딱 230살이 되었습니다. 까불면 안됩니다. 청하산을 뒤로 하고 앞으로는 동진강 상류가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터입니다.
김동수 가옥 앞 산외면 오공리의 너른 들판
노비들이 살던 호지집으로 집 담장 밖에 8채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2채가 남아있다. 문화해설사 선생님들이 사용하고 계신다.
바깥 행랑채와 대문. 말을 탈 때 디딤돌로 쓰던 하마석이 보인다.
솟을대문을 들어가면 조그만 마당이 나온다.
이 마당에서 또 사랑채로 들어가는 솟을대문이 보인다. 저 솟을대문을 들어가면 사랑채다. 미로다. 전통가옥에서 중심은 마당이다. 마당을 만들기 위해 집을 앉혔다.
그리고 사당채. 기단도 낮고 마루도 낮다. 나는 저런 낮은 집이 좋다. 친근하면서 올라가기도 편하고, 그래서 무릎도 안 안프고. 소박하면서 단아하고, 간결하면서 세련되었다.
행랑채에서 본 사랑채 전경이다. 근데 김명관이 지었는데 이름은 김동수 가옥이지?? 그 이유는 이 집이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집 주인이 김동수씨였다고.....
아무도 없는 옛 집에서 아이들이랑 실컷 뛰어 놀았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도 하고..... 옛 살림집 중에 백미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않고 정읍 김동수 고택이라고 말하겠다.
이 집의 사랑채는 사대부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높다란 기단이 거의 없습니다. 단지 마당과의 구분을 위해 키 낮은 댓돌만 한 단 깔았을 뿐입니다. 기단은 시원한 조망을 얻기 위해 설치하기도 하지만 안채나 행랑채에 비해 건축적으로 높은 위계를 갖기 위한 수단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양반이고 너는 행랑채에 사는 머슴이니까 내가 너를 내려다 보는 위치에 있어야 되지 않것냐... 이런 것이 김동수 가옥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내나 마눌이나 머슴이나 똑같이 사람인겨~~ 머 이런거죠....
뿐만 아니라 이 집의 사랑채는 사대부집 사랑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누마루도 없고 마루의 높이도 매우 낮습니다. 그만큼 건축물이 지면과 가까이 붙어 있어서, 위압적이지 않고 친근감을 줍니다. 그렇습니다. 저 마루에 앉으면 되게 편합니다. 마루에 앉아서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보통의 대감님집 마루는 불편합니다.
최근에 정읍시장이 “ 정읍은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이자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낸 성지이고, 백제시대 행상나간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이 된 백제여인의 마음을 담은 현존하는 최고의 가요 ‘정읍사’의 고장이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초대 정읍현감을 지냈고, 가사문학의 효시인 상춘곡이 태동했으며,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김동수 가옥이 자리하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라고 정읍을 소개했다고 합니다. 김동수 가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안채이다. ㄷ자형으로 좌우대칭이다. 이런 안채 드물다. 그런데 이걸 딱 절반을 나눠서 시엄마와 며느리가 썼다. 맨끝은 부엌이다. 그러니까 각각의 부엌을 썼다는 거다. 서로 간섭 같은 거 하지마라는 소리다. 아.... 얼마나 현명한가!!!
안채와 안채를 마주보고 있는 안행랑채. 보통 안채가 ㄷ자형이면 행랑채는 ㅡ자형이다. 그렇게 해서 이 ㄷ자형에 ㅡ자형 행랑채를 붙이면 마당이 굉장히 좁아진다. 그렇다고 널찍하게 띄우면 마당의 형태가 좀 이상하게 되고. 그래서 이 집은 안행랑채도 아예 ㄷ자형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안채를 감싸게 해서 아늑한 마당을 만들었다. 이 집 설계자, 천재다.
그런 운치있는 고택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어부인......
안채 옆의 안사랑채. 안방마님의 친구들이나 며느리의 친구들이 오면 놀고 묵는 곳이다. 남자가 기거하는 사랑채는 딸랑 하나인데 여자들의 공간은 안채와 안사랑채 둘이다. 이 집을 지었던 김명관이란 냥반은 아마 여자들한테서 사랑 많이 받았을 것 같다.
사통팔달인 사랑채 대청. 집의 규모에 비해 넓은 마루다. 이런 널찍한 마루, 좋다. 요즘 아파트도 방의 크기를 줄이고 거실을 크게 만든다. 집이 크게 보일 뿐만 아니라 거실을 가족의 공동 공간으로 쓴다는 인식이 커져서 그렇다.
앞 뒤로 다 뚫려 있어서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햇볕도 집안 깊숙히 들어온다. 우리 한옥의 가장 큰 장점이다.
한옥 부엌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따사롭다.
북쪽에 떨어져 있는 사당. 둥근 기둥이 인상적이다.
김동수 가옥은 호남 지방의 양반 지주집이지만 일반 대감님집이랑은 많이 다릅니다. 위계나 권위 같은 것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대신에 소박하고 정갈하며 질박하면서도 세련된 모습과, 더하여 마당구성의 독창성이나 넉넉함은, 한국인의 심성을 잘 담아낸 집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사대부집의 공간 구성과 민가의 소박한 구조형식이 잘 결합되어 세련된 건축미와 주거건축의 독특한 유형을 보여주는, 살림집의 백미입니다.
8. 세계문화유산 경주 양동마을의 중심 건물 - 양동마을 향단
세계문화유산 경주 양동마을 전경.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손소가 땅을 하사받아 월성 손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이후 여주 이씨도 손씨집안에 시집와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향단 뿐 아니라 관가정, 무첨당 등 다수의 보물 건축을 볼 수 있다.
양동마을에서 본 향단 전경. 왼쪽 위에 있는 것이 관가정이고 오른쪽이 향단이다. 관가정은 월성 손씨의 작품이고 향단은 여강이씨의 작품이다.
옛날 살림집을 무진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은?
앞서 본 일두 고택이 있는 함양 개평마을도 많구요,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영남 4대 센 터라고 한 안동 하회마을, 내앞마을, 봉화 닭실마을, 경주 양동마을 등에 가면 고택들 즐비합니다. 고택들이 많다는 건 종가집이 많다는 것이고, 이는 씨족마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하회마을을 풍산 류씨 집성촌이고 내앞마에는 의성 김씨 종택이 있습니다. 닭실에는 안동 권씨 충재 권벌의 종택이 있구요, 양동마을은 월성 손씨와 여주 이씨의 집성촌입니다.
이 마을들에 가면 우리의 옛 살림집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씨족마을의 전통을 그 대로 엿볼 수 있는데요, 이 전통마을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됩니다. 이런 경사가~~. 그리고 향단은 이 양동마을의 가장 중심 건물입니다.
향당 전경. 위압적이고 거대한 행랑채가 인상적이다.
향단은 동방오현중의 한명인 회재 이언적 선생(1492~1553)이 교육부 장관으로 있을 시절, 늙은 어머니 봉양을 이유로 사직서를 올리자 중종이 어머니를 편안하게 모실 수 있도록 짓게 한 집입니다. 설계는 물론 이언적 선생이 직접 했구요.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근데 이언적이 지은 또 다른 보물이 있는데요, 독락당이라는 집입니다. 당대의 간신 이안로가 이조판서(행정자치부 장관)에 등용되는 것을 반대하다 삭탈관직 당하고 고향에 내려와서 공부나 하려고 지은 집입니다. 그러니까 이 양반이 집 두채를 지었는데 모두 지금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대단한 건축가입니다.
그럼 여기서 살림집 중에서 보물로 지정된 집들을 한번 살펴볼까요.....
1. 안동 임청각
2. 대전 회덕 동춘당
3. 안동 하회마을 양진당
4. 경주 양동마을 무첨당
5. 경주 양동마을 향단
6. 경주 안강 독락당
7. 안동 하회마을 충효당
8. 경주 양동마을 관가정
9. 안동 의성 김씨 종택
10. 예천 권씨 종가 별당
11. 안동 소호헌
12. 안동 예안 이씨 충효당
13. 대구 달성 태고정
14. 상주 양진당
15. 서울 창덕궁 낙선재
16. 서울 창덕궁 연경당
빠진게 있을 지도 모르지만, 머 이 정도입니다. 음..... 그러고 보니 대전에 있는 동춘당, 서울 창덕궁 빼고는 다 경북에 있군여..... 대단합니다. 우리나라 옛 살림집을 이야기할 땐 경상북도를 빼놓고는 이야기가 안될 것 같습니다. 머 살림집만 그러겠습니까.... 서원이며 절이여..... 지금 정치도 마찬가지. 그런데 대한민국 최고의 전통가옥이라 불리는 강릉 선교장이나, 하회마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살림집인 북촌댁, 살림집의 백미라 불리는 구례 운조루나 정읍 김동수 가옥은 보물에서 빠져 있는게 쪼금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듭니다.
양동마을 안쪽 높은 언덕위에서 화려한 기와선을 뽐내는 향단은 늙은 엄마를 모시기 위해 지은 99칸의 집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일부 소실되고 지금은 56칸이 남아있습니다. 향단이라는 이름이 이채로운데요, 집을 다 짓고 이언적이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자 동생에게 물려주었는데요, 동생의 손자 호가 향단이랩니다.
무엇보다 이 집은 노모가 있는 안채가 중심입니다. 안채를 중심으로 행랑채도 바짝 붙여 놓았고 사랑채도 다른 건물과 붙여서 안채를 아예 감싸버렸습니다. 노모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으면 이런 배치를 했을까요....
아래에서 보면 이 거대한 행랑채밖에 안 보인다. 행랑채에서 안채로 갈라치면 반드시 사랑채를 거쳐서 가도록 했다.
사랑채로 올라가는 계단
가장 높은 곳에서 마을을 굽어보는 사랑채. 탁 트인 뜰과 높은 지대로 마루에 앉아 내려보는 경치는 더할 나위 없다. 또한 건물 측면에 있어야 되는 풍판을 정면으로 디자인하였다 이는 일반 살림집에서는 보기 힘든 양식으로 서원이나 향교건축에서 배껴왔다. 권위적이면서 독특한 모습이다.
사랑채 마루에서 보는 전경
행랑채와 안채사이.
안채 마루에서 보는 행랑채 지붕. 시야가 가린다. 원래는 이 정도로 딱 붙어있지 않았으나 행랑채를 복원하면서 더 안채와 더 붙였다. 일반 살림집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둥근 기둥이 인상적이다.
양동마을은 손씨 동네였습니다. 그 유명한 관가정도 손씨 꺼고. 그래서 이언적은 우리 가문도 손씨에 못지 않다...라고 좀 보여주고 싶었나 봅니다. 그래서 여러가지 건축형식을 사용하여 화려하고 권위적이며 독특하게 보이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대부의 품격과 격식을 갖추면서도 합리적이고 집약된 공간구성을 보이는 것이 이 향단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김동수 가옥과 비교하면 이미지부터 사뭇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언적이 지은 또 다른 살림집 독락당과도 분위기가 다르니 한번 비교해보시면 좋은 듯 합니다.
향단의 종부 사진. 이용재 선생의 홈페이지에서 퍼왔다. 상당히 미인이시다.
옛 살림집 8점을 대략적으로 살펴 보았습니다. 사실 이것 말고도 가서 보고 앉고 느끼고 싶은 우리 고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위의 향단편에서 언급한 보물로 지정된 우리 옛집도 13점이나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보물들에 대해서도 글을 적도 싶습니다.
근데 실제로 저런 곳에서 살래? 라고 물으면 선뜻 대답이 안 나옵니다. 용기가 필요합니다. 저런 곳에서 사는 용기가 아니라 마눌한테 매일 욕 들을 용기가요....ㅋㅋ 실제로 대부분의 고택에서는 아직 종부나 종손이 살고 있습니다. 대단하죠.....
대부분의 글과 그림은 이용재 선생의 블로그 인문학적인 집짓기에서 옮겨왔고, 엽토51님의 쏠쏠한 일상과 지리산닷컴에서도 주요 사진을 옮겨 왔습니다. 그 외에도 Bezzera(언젠간 날고 말거야), 문화가 역사가 만나는 그 곳님의 티스토리, 네이버의 얼음과 남편씨, 한국사람(한겨레블로그), 다음의 풍류마을, 극락조, 아라가야님의 건축사사무소 아라가야, 한옥목수 허경도의 이야기 까페와 블로그, 임청각 군자정 홈페이지, 운조루 홈페이지, 전원주택라이프, 광주하계 유니버시아드 블로그, 서울경제신문, 비니머니님의 블로그 (독서같은 여행 비니머니집), 한옥스테이, 위키백과에서 글과 그림을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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