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

(158)
책, 책, 책 # 8. 책, 책, 책 내 가방 속에 들어있는 게 뭔지 확인할 필요도 없다. 책 한 권 달랑 들어있다. 지금 가방에 있는 건 프리모 레비의 라는 책이다. 이탈리아 유대인의 아우슈비츠 생존기다. 가방에 들어간지 5일째. 슬슬 바꿔줘야 할 타이밍이나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아 한동안 가방을 독차지하고 있을 것 같다. 가방에 읽을 책을 넣어다니는 습관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꽤 오래 전부터 책을 항상 지니고 다녔다. 책은 언제부터인가 나에게 도락道樂이었다. 혼자 즐길 수 있는 취미다. 책이 단지 나에게 즐거움만 주었나? 그렇지 않다. 오히려 힘든 시기에 책을 더 많이 읽었다. 현실이 어려워지면 더 책읽기에 파고 들었다. 책을 읽는 동안만이라도 시간의 무..
아내에게 # 7. 아내에게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지, 막상 당신에게 편지를 쓴다고 하니 헝클어진 머리 속의 어디서부터 매듭을 풀어야 할지 모르겠소. 당신은 한국에 있고 나는 일본에서 혼자 일했던 초창기의 장거리 연애 시절엔 자주 편지도 쓰고 애틋하고 했는데 말이오. 그 시절엔 서로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인색하지 않았지요. 어떻게 하면 당신에 대한 나의 감정을 더 잘 나타낼까, 당신의 감정을 어떻게 하면 잘 받아들일까 하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었는데. 아, 나만의 생각인가요? 세월이 많이 흘러 지금은 서로의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감추려고 할 때가 많은 것 같아요. 그 시절엔 세상이 당신과 나로 이루어졌지만, 세월은 당신과 나 사이에 여러가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 것들에 조금씩 익숙해져서 어쩌면 서로에..
긴 하루 # 6. 긴 하루 오늘도 제대로 깨졌다. "실장님. 그 일에 대해서는 실무자인 제가 가장 잘 압니다. 제 판단을 존중해 주셔야 되는 것 아닌가요?" 라는 말이 목구멍으로 올라 왔으나 내뱉지 못했다. 결국 벙어리마냥 어버버거리며 온갖 질책을 그대로 받았다. "여보. 이제 버틸만큼 버틴 거 같애. 더 이상은 힘들어. 이제 그만 할래. 부탁이야. 그렇게 하게 해줘" 급기야 아내에게 말했다. 아내는 불안한 기색을 완전히 숨기질 못했으나 그래도 흔쾌히 "그러마" 라고 대답했다. "너 요즘 힘든 거 다 알아. 노가다밥 묵자. 굳이 맞지 않는 상사밑에서 힘들게 할 필요 없잖아. 곧 개설될 땡땡현장 공사책임자 자리에 사람이 필요해. 이제 필드 뛰자." 공사팀의 인력담당 강부장이 말한다. 타이밍 하나는 귀신이군. 어찌 ..
젓가락질 잘해야만 밥 잘 먹나요? # 5. 젓가락질 잘해야만 밥 잘 먹나요? 아빠 : 강아, 안되겠다. 뽀로로 젓가락 다시 해야겠다. 형 : 형은 임마, 사학년때 젓가락질 다 땠다. 누나 : 니 그렇게 젓가락질 못하면 중학교 가서도 뽀로로 젓가락 사용해야 된다. 어이~~ 엄마 : (아빠, 형, 누나를 흘깃 째려본다.) 막내 : 오학년이 우째 뽀로로 젓가락 사용하노? 그라고 젓가락으로 밥 잘 묵는데 와 시빈데!! 밥 잘 먹다가 사단이 났습니다. 막내의 젓가락질이 여전히 시원찮아서 몇 번이나 지적을 하고 사용법에 대해 상세히 가르쳐도 봤지만 여전히 개선의 여지가 없자, 드디어 밥상에서 한 마디 했습니다. 덩달아 형과 누나도 자신들의 젓가락질을 뽐내기라도 하듯 한 소리 거듭니다. 첫째와 둘째에게는 별다른 지적이나 교육이 없었습니다. 근데도 자..
남이 차려주는 밥 # 4. 남이 차려주는 밥 "월화수목금 내내 바깥 밥 먹었는데, 집밥 좀 묵자!" "나는 내내 집밥만 묵고 살았다. 외식 좀 하자!" 주말에 싸우는 흔한 래퍼토리 중에 하납니다. 늘 회사밥 혹은 식당밥을 먹던 저는 주말만이라도 집밥을 먹고 싶었습니다. 김치 한 가지에 국 한 그릇이라도 갓 지은 밥에 가족들과 도란도란 집에서 먹고 싶어했고, 반면에 아내는 늘 먹던 것던 것에서 벗어나 뭔가 새로운 것들을 밖에서 먹기 원했습니다. 한 동안 그걸로 꽤나 티격태격 했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주말에 제일 한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침에도 제가 제일 먼저 일어납니다. 배가 고프기도 하고 딱히 할일도 없으니 밥을 차립니다. 대충 있는 김치로 찌게를 끓일 때도 있고, 전날 장 봐둔 생선을 구울 때도 있습니다. 정 없으면 ..
혼자 놀기를 배워야 할 때 # 3. 혼자 놀기를 배워야 할 때 "주말에 집에 내려 갈까?" "오지마! 애들도 1박2일로 놀러가. 나도 바쁘고. 내려와봤자 당신이랑 놀아줄 사람 아무도 없어. 서울에서 혼자 놀아!" 아이들이 아빠를 필요로 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애들이랑 공도 차고 자전거도 타고 산책도 즐겼습니다. 그 시절엔 아내도 남편이 필요한 시기였습니다. 같이 손을 잡고 공원을 거닐거나 집 앞 오솔길을 걷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 다들 자기들의 생활로 바빠졌습니다. 주말에 내려가도 아이들 얼굴 보는게 힘들 때가 많아졌습니다. 한창 친구들 좋아할 나이긴 하지만요. "니가 아빠랑 놀아줘라" "나는 친구 만나기로 했단 말이야, 오빠야가 같이 쫌 놀아주라." "형이랑 누나야는 어데 나가고, 왜 맨날 나만 아빠랑 놀아줘야 돼..
완벽한 여행지 # 2. 완벽한 여행지 일상을 살면서 언제나 여행을 꿈꿉니다. 유럽의 저 멋들어진 건물로 가기도 하고, 아리따운 여인들이 넘실거리는 호주의 해변으로 가는 꿈도 꿔봅니다. 수백만년의 시간이 그대로인 몽골 고비로의 여행도 좋습니다. 여러 여행지 중에서 특히나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런 여행이 요즘 가장 땡깁니다. 해먹과 벤치를 옮겨다니며 종일 눕거나 앉거나 책을 읽거나 그마저도 지겨우면 동네 꼬마녀석들이 노는 모습을 보거나 하는 여행말이죠. 근데 가장 가까운 곳에 이것과 비슷한 공간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집입니다. 이방 저방을 굴러다니며 과자나 간식거리를 먹으며 하루종일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게 따분해지면 아이들과 밖에 나가 논두렁 사이길을 걷거나 캐치볼을 하며 놀고, 그러다 들어와서..
프롤로그 # 1. 프롤로그 막상 100일 글쓰기 신청을 하고 나니, 슬금슬금 후회가 몰려온다. 업무상 마감이라는 걸 겪다보니, 마감의 위력을 잘 안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게 마감인데, 굳이 자발적으로 마감이란 걸 만들어가면서 글을 쓸 필요까지야. 그렇다고 대단한 글쟁이가 되겠다는 거창한 다짐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진즉부터 관심은 있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진짜 바빠서, 차일피일 미루다 학당의 지인의 꼬임과 학당 수업 중 가장 가성비가 높은 수업이라는 달콤한 말에 별 생각없이 덜컥 신청했더랬다. 100일 동안의 글쓰기라.... 사람이 되겠다는 곰같은 집념도 부족하고 쑥과 마늘로 100일 동안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절치부심의 노력도 부족하고, 100일 후 짜쨘하고 곰으로 변하는 것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