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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야기

어디까지 가봤니? 울나라 건축물 1 - 당신과의 문화유산답사기 10편

 

 

 

 

당신과의 문화유산 답사기 10

 

 

 

 

 

 

 

 

 

인생도처 유상수

 

 

강호 무림에는 이름없는 고수가 도처에 널려있다는 말입니다. 요즘 건축물 관련 이런 저런 자료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정말 고수가 수두룩빽빽 합니다. 얼마전에 울나라 국보로 지정된 건축물에는 뭐가 있나 궁금해서 찾아보고 거기에 대해서 글로 좀 적었었는데요, 나중에 알고 보니 <딸과 떠나는 국보 건축기행>이라는 책도 나와 있더라는

 

 

아 역시 고수들 천지입니다. 파황신군이나 빙옥선제, 천잔왕 구휘같은 고수들이 득실득실합니다. 떠거럴진정 인터넷 강호의 세계는 넓고도 넘사벽의 세계입니다.

 

 

유홍준 선생의 책은 그야말로 나처럼 어디 갈지 몰라 헤메고 있는 이들에게 야 요기 가서 저걸 보는 거야. 저거를 볼 땐 말야, 이렇고 저렇고 하니그렇지 딱 거기를 잘 보는 거야라고 친절하게 가르쳐줍니다. 그럼 나처럼 게을러 빠진 이들은 딱 책에 쓰인대로만 가서 쓰인대로만 보고 옵니다. 그래도 뭔가 뿌듯합니다.

 

 

아는 만큼 보입니다. …. 모르면 안보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아내랑 아이들이랑 가족 여행을 갈라치면 어김없이 길잡이는 유홍준 선생의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유홍준 선생의 답사코스에서 인상 깊었던 곳을 적어 보고자 합니다. 오래되어 기억이 좀 가물거리도 합니다만다시 기억도 되살리고, 정리도 좀 하고 해서 다시 갈 때쯤엔 선생의 시각과 좀 다른 눈으로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1. 위로는 제주의 여인네들에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 제주 와흘리 본향당

 

 

 

 

 

 

머나먼 중동 사막에서의 생활은 단조롭기 그지 없습니다. 매일 보는 풍경, 그리고 매일 보는 사람들, 매일 똑 같은 밥그러나 그 중에서 제일 힘든 건, 지독시리 말도 안듣고 돈만 달라는 이집트 어느 업체도,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발주처의 수단 Inspector도 아닙니다. 외롭고 힘든 마음을 위로 받을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주의 여인네들도 그랬을 겁니다. 신랑이라고 있는 것들은 하나 같이 게을러 터져 집구석에서 밥이나 처묵고 하는 일도 없이 빈둥빈둥. 혼자서 아이 낳으랴 키우랴, 농사 지으랴, 멍게 따랴, 밥 하랴, 엄청 힘들었을 텐데, 어데 가서 힘들다 하소연 할 곳도 마땅치 않고…..

 

 

본향당이란, 제주사람들 특히 제주여인네들 영혼의 동사무소, 요즘 말로 하면 주민센터예요. 제주여인네들은 자기 삶에 일어난 모든 것을 본향당에 와서 신고한답니다. 아기를 낳았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사고가 났다, 돈을 벌었다, 농사를 망쳤다, 육지에 갔다 왔다, 차를 샀다, 우리 애 이번에 수능시험 본다, 우리 남편 바람난 거 같다, 이 모든 것을 신고하고 고해 바칩니다.

 

 

제주 신의 중요한 특징은 신과 독대한다는 점입니다. 제주의 신을 할망이라고 해요. 어머니만 해도 다소 엄격한 데가 있죠. 여성은 소문내지 않고 자신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을 필요로 하는 심리가 있거든요. 답을 몰라서가 아니죠. 그런 하소연을 함으로써 마음의 응어리를 푸는 것입니다. 모진 자연과 싸우며 살아가는 제주인들에겐 이런 할망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죠. 심신의 카운슬링 상대로 할망을 모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권 중에서

 

 

 

 

제주의 여인들도 위로가 필요했을 겁니다. 지치고 힘든 생활. 그래서 여기와서 할망한테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했겠지요. 그리고 스스로 위안을 받았을 겁니다.

 

 

그리고 희망사항도 있었을 겁니다. 아들 꼭 낳게 해달라, 전복 많이 따게 해달라, 신랑 말 쫌 잘 듣게 해달라, 아이들 건강하게 해달라, 시엄마가 덜 구박하게 해달라, 남편 밤에 잠만 자지 않게 해달라…. 등등 그런 소망을 흰 종이에 담아 본향당의 저 영험 많은 팽나무에 걸어 놓으면 다 이루어지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위안이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소지는 글자가 안 적혀 있습니다. 글 아는 여인네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흰 종이를 가슴에 품고 그런 소망을 마음으로 새기면 종이에 그 마음이 담긴다고 생각했겠지요…. 위 사진의 흰 종이들은 그런 제주 여인들의 소망을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도 비록 흰 종이를 나무에 걸지는 못했지만 할망한테 열씨미 빌었습니다. 우리 마눌 더 이상 거씨지 않게 해달라고, 사실 지금도 좀 버겁다고, 신혼때의 그 싸근싸근하고 착착 감기는 그런 아내는 바라지도 않는다고, 다만 지금보다 더 거씨지만 않게 해달라고….

 

 

그렇게 빌었건만,

할망이 바람이 나서 할방 만나러 갔는지…. 에휴….

 

 

제주에는 절오백 당오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동네마다 유홍준 선생 말마따나 주민센터인 당이 있었습니다. 산신당도 있었고 해신당도 있었고 심지어 바람이 많이 불어 피부가 거치니 좀 보드랍게 해달라고 비는 피부당도 있었고요…. 이 무시기라는 제주 목사가 와서 절도 당도 태워버렸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만.....

 

 

여하간, 여기 와흘리 본향당도 그 수많은 당중의 하나구여, 이 본향당중에서 짱 먹는 본향당이 있는데요, 구좌읍 송당리에 있는 송당 본향당 (아래 사진) 이 그 주인공입니다. 제주 일만 팔천여 신들의 고향이라고 하는데여….

 

 

참고로 제주에는 오대 신당이 있다고 합니다. 와흘 본향당 새미 하로산당 수산 본향당 월평 다라쿳당 그리고 송당 본향당이라고 합니다.

 

 

 

 

사실 와흘 본향당은 네비찍고 가면 누구나 엥? 합니다. 다왔다고 그러는데 못찾는 거죠…. 그냥 길가에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있으니, 좀 근사한 장면을 기대하고 오면 꽝입니다. 그 안에 들어갈라 치면 물론 좀 으스스하니 영험이 많게 느껴지긴 합니다만. 그래도 송당 본향당은 자료를 찾아보니 그렇지는 않은가 봅니다. 사진처럼 재실 비슷한 것도 있고…. 담에 제주도 가면 함 들러봐야겠습니다. 와흘 본향당에서 못다 이룬 소망을 송당 본향당에서는 기필코!!!..... 송당 본향당에서도 안되면 제주 오대 신당을 모두 가볼테닷!!!

 

 

. 그리고 와흘 본향당으로 가는 길에 하루방의 할배쯤 되는 사람닮은 석상이 있습니다. ~ 여기 나오는 군여. 삼백년 전에 절오백 당오백을 불태운 사람…. 그때 사람들이 숨겨둔 석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근데 석상 표정이 넘 적나라합니다. 저렇게 재미있는 석상에 절을 하고 제사를 올리는 것도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닐까 싶습니다.

 

 

 

 

 

 

허걱이건 울 막내아들 아니냐!! 석상 표정 따라하기가 무척이나 재미있었습니다. 석상은 제주도만의 해학이었습니다.

 

 

제주 여인들의 쉼터이자 위로를 받고 또 마음속의 이야기를 하면서 위안를 얻는 곳, 와흘 본향당이었습니다. 그 여인들은 속내를 이야기 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책에 쓰여 있는데요, 어디 꼭 제주여인들만 그렇겠습니까. 사막에서 노가다하는 저도 속내를 이야기하고 위로 받을 수 있는 곳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번 저도 주말에는 위로를 받으로 가야겠습니다. 여기서 외로움을 달래고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곳은 진짜 몇 안됩니다. 그 몇 안되는 곳 중의 하나인 정말 이쁘지도, 아무렇지도 않은 중국 작부가 있는 곳으로ㅎㅎ

 

 

 

 

 

 

2. 만져는 봤습니까? 앙증맞은 사자 궁뎅이 합천 영암사지

 

 

 

일본에 살면서 가장 부러운 건 그들이 시골다운 시골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도심지만 벗어나면 어느 풍경이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제가 사는 김해라는 동네도 웬만한 시골에 들어가도 보기 흉한 공장들이 이곳 저곳 자리잡고 있습니다. 항상 그게 참 아쉽습니다. 얼마나 더 지나야 공장은 공장끼리, 사람사는 집은 집끼리 그렇게 구획이 될까요….  

 

 

그래서 유명한 답사지는 전라도에 혹은 경상북도에 있습니다. 그 동네에 가면 야 우리나라에 아직 이런 곳이 남아있었어? 하고 감탄이 나올만한 그런 곳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경상남도에도 있습니다. 합천 거창 산청 즉 서부 경남입니다.

 

 

 

 

사실 서부경남의 저 오지(?)들은 잘 안가지는 동네이지만 가보면 입에서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동네이기도 합니다. 합천 황매산을 찾아가는 길은 굳이 제가 있는 이 동네, 반경 200키로는 다 사막인 이 황량하기 그지 없는 곳을 예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깨닫기에 충분합니다.

 

 

차를 타고 답사를 다니다 보면 나라에서 자동차도로 하나는 잘 닦아놓았다는 찬사가 절로 일어난다. 거미줄 같은 고속도로에, 능숙한 터널공사로 질러가는 길을 척척 뚫어낸 솜씨에는 감탄마저 나온다. 그러나 국토의 운영에서 심심산골 오지는 오지대로 남겨두어야 했던 것 아닐까? 자연의 원래 모습을 간직한 첩첩산골은 문명에 찌들어 살아가는 현대인을 달래줄 수 있는 심신의 위안처이다.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권 중에서

 

 

 

 

영암사지는 폐사지입니다. 화려한 옛 영화는 가고 이제는 쓸쓸히 낙엽만 뒹구는 폐사지가 아닙니다. 이곳은 어느 블로거의 말마따나 당당한 폐사지입니다. 가보면 압니다. 왜 당당한 절터인지.

 

 

 

 

 

 

절은 보통 무지 산속에 그냥 틀어박혀 있거나(화순 쌍봉사), 혹은 절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굉장히 좋거나(영주 부석사), 아니면 뒤에 멋진 산을 가지고 있는 (부안 내소사) 그런 터에 있다고 하는데요, 영암사지는 이 셋이 모두 해당된다고 선생은 말씀하십니다. 맞습니다. 제가 가본 절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터였습니다. 그냥 거닐기만 해도, 혹은 잠깐 천년이 넘은 돌을 깔고 앉아 그냥 주위를 바라보기만 해도 그저 포근하고 아늑합니다.

 

 

 

 

 

 

그래도 절터가 아무리 아름답기로서니 정말 아무것도 없으면 쓸쓸하겠지요. 그러나 영암사지에는 볼거리가 쏠쏠합니다. 석축이 있고 탑이 있습니다. 비석은 없지만 훌륭한 귀부도 있습니다. 석축위로 올라가는 싸인 12도 계단이 있고 아무렇지도 않은 기단부의 돌에는 하나하나 장식이 있습니다. 아니 이런 곳에 까지 조각이?? 싶을 정도로 아주 구석진 곳까지 뭔가를 다 새겨 놓았습니다.

 

 

그 시절의 석공은 지금과는 달랐을 겁니다. 자신이 믿고 따르는 부처님을 모신 곳을 조각하는 그 마음가짐이, 아마도 아침에 냉수로 목욕재개하고 정을 들었을 겁니다. 어쩌면 부정탄다고 일을 하는 동안은 마눌이랑 응응도 안했을 겁니다. 세발자국 걷고 한번 절하는 라싸의 그 대단한 아저씨들처럼은 아니더라도 하나의 조각이 끝나면 절을 하고 또 마음을 다잡고지금은 그때보다 장비나 기술이 훨씬 발달하였지만 돈에 맞추고 공기에 맞추는, 예전의 저런 작품이 나오기에는 환경이나 정성이 많이 열악합니다

 

 

 

 

 

그리고 영암사지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요것입니다. 글머리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권 표지에도 나와있는 쌍사자 석등입니다. 영암사지를 쓸쓸한 폐사지가 아닌 생동감있는 곳으로 만들어 주는, 이 석등은 반드시 이 자리에 있어야만 될 것 같은, 그리고 앙증맞은 사자의 궁둥이가 매력적인 석등입니다.

 

 

사실 사자라고 해서 사자인 줄 알지 어찌 보면 멍멍이 같기도 하고 좀 애매합니다. 보면 뭔가 꼬리가 쏙 말려 올라간 것이, 엉덩이에 살이 포동퐁동한 것이 재미있습니다. 이거 조각한 그 때의 석공들은 사자라는 동물은 본적이 있을까요? 아님 그림책에서 봤나? 좀 궁금하긴 합니다.

 

 

 

 

 

일제시대 때 일본넘들이 가지고 가려는 걸 가회면 사람들이 막 숨겨놓고 안주고 그러다가 1959년에 절터에 암자를 짓고 다시 옮겨 놓았다고 합니다. 정말 박수를 쳐주고 싶습니다. 잘했다고, 비석도 세웠다고 합니다. 가회면사무소 앞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사자석등에 대해 좀 살펴보니 이렇게 서있는 사자석등은 세개가 있다고 합니다.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과 법주사 쌍사자 석등이 있습니다. 그 밖에 앉아 있는 쌍사자 석등도 몇 개 있구요

 

 

학자들은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을 제일 쳐준다고 하는데요, 그건 석등만 놓고 보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주위의 풍광, 절집, 절터와의 조화, 천년의 세월의 무게와 향기를 느끼게 해주는, 이런 것을 고려한다면 영암사지의 이 석등이야 말로 가장 가치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막내아들입니다. 시간이 좀 지난 사진이지만... 이런 사진은 언제나 좋습니다. 손에는 그 쌍사자 석등이 나오는 책을 들고.....

 

 

 

 

 

아냅니다. 황매산의 모델입니다.... 예쁩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더 예쁠 겁니다.....ㅎㅎ

 

 

 

 

 

 

3. 툇마루의 따스한 햇살이 그립습니다 - 강진 김영랑 생가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김영랑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백수로 시절을 보낼 때 아내 (그 당시에는 이 여자가 아내가 될 지 몰랐습니다. 정말입니다.) 와 처제, 그리고 처제의 남자친구와 함께 땅끝으로 여행을 갔더랬습니다. 시간이 벌써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그 여행길에 잠깐 들른 김영랑 생가입니다.

 

 

 

 

 

 

벌써 15년전이니까, 사실 기억도 잘 안납니다. 유홍준 선생님이 함 가봐라 캐서 갔을 겁니다. 그런데 그 총각 시절에 갔던 곳이 이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벌써 엄마 키를 훨쩍 넘어 자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기억속에 생생하게 남았는 것이 있습니다. 툇마루에 앉아 따사한 햇볕을 쬐던 기억입니다. 참 포근했습니다.

 

 

 

 

1919 3 1. 서울 휘문의숙에 다니던 16세 소년은 3·1 선언문을 품에 숨기고 고향인 전남 강진에 내려온다. 독립만세운동을 벌이려다 일경에 체포되는 바람에 6개월 동안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다. 홍사용 박종화 정지용 이태준 같은 선후배 틈에서 문학을 논하던 소년은 졸업장을 받지 못한 채 일본으로 건너갔다.

 

 

간토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도 포기하고 귀국한 그는 1930년 ‘시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한때 친구의 누이동생인 무용가 최승희와 목숨을 건 사랑에 빠진 낭만파 청년. 일제강점기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고 광복 이후 고향에서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6·25전쟁 때 서울에 숨어 있다 수복 하루 전날 포탄 파편에 맞아 목숨을 잃는다. - 인터넷의 김영랑의 약력

 

 

김영랑 시인에 관한 자료를 찾다 최승희와의 사랑이야기 나오길래 좀 유심히 봤습니다. 참 둘이 죽고 못사는 사이였다는 군요. 근데 양가 집안에서 반대했다고 합니다. 영랑네 집안에서는 저런 발라당까진 서울 깍쟁이는 안되어야 이고 승희네 집안에서는 어디 촌구석의 이름도 없는, 머시라? 시인??? 그래서 영랑이 막 떼를 쓰고도 안되니까 급기야 목을 매다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가족이 일찍 발견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모란은 피지도 못할 뻔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살소동이 일어났을 때 영랑은 22살, 최승희는 무려 13살이라고.........ㅋ

 

 

이런~~~ 아직 머리 피도 안마른 것들이.... 니들이 머 사랑을 알기나 알어!!!

 

 

 

 

 

 

네. 그 무용가 최승희가 맞습니다. 한국의 이사도라 던컨이라 불리는.... 그렇게 목숨을 걸 정도로 사랑을 했지만, 영랑은 다른 여인을 아내로 맞아 무려 7남 3녀를 낳았고, 최승희도 인민무력부장사회주의 문학가인 안막이라는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그녀는 북에서 인생의 말년엔 숙청을 당했다고 합니다만) 사랑이란.... 역시 모르는 겁니다.

 

 

근데 어찌보면 그런 감수성이 있었기에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그런 아름다운 시를 쓸수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메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불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니리

바람이 자지어서 걱졍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메 단풍 들것네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 김영랑

 

 

참..... 이런 시는.... 정말 별 것 없이 느껴집니다. 감잎이 떨어지고 누이가 쳐다보고 단풍이 들고....초등학교 6학년이 쓴거 같습니다. 근데 뭔가 포근합니다. 하기사 김용택 선생의 콩 너거 인자 다 죽었다 라는 시도 거의 초4정도의 수준입니다만.... ㅋㅋㅋ

 

 

그 당시 같이 막 놀러 다니고 술 묵어러 다니고 하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같이 잡지에다가 시도 내고. 그 친구들은 당시 유행하던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머 이런거 말고 진짜 아름다운 시만 쓰자 라고 했습니다. 그 친구들이 정지용, 변영로, 이하윤 머 이런 시인들이었는데요, 시문학이라는 작품을 펴내서 시문학파라고 한댑니다. 그 시문학파 시인들을 기념하는 기념관이 영랑 생가 옆에 있다고 하니 같이 들러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유홍준 선생의 책을 읽었는지라 책에 나와 있는 해태식당은 꼭 가봐야 된다고 우겨서 그 당시에 갔었습니다. 책에는 1인분에 8천원... 근데 가보니 1인분에 만오천원!! 엥?? 크~~ 돈이 모자라~~ 아이 쪽팔려.... 주인장한테 막 땡깡부려서 3인분을 시켜 4명이 먹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감사한 일입니다. 지금은 얼마? 라고 찾아보니 1인분에 삼만원.... 무섭군..... 하지만 그래도 한번 더 가서 묵고 싶습니다. 남도 정식........

 

 

 

 

 

 

 

 

 

4. 만대루는 절대 공부하는 곳이 아닙니다 - 안동 병산서원

 

 

 

 

 

서원은 지금으로 치면 사립대학교입니다. 그 시절에도 입시가 치열했을 터, 좋은 직장을 얻으려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하는 것은 지금과 똑 같았을 겁니다. 그래서 들어가기가 졸라 서울대 연고대만큼이나 어려운 그 시절의 다섯개의 사립대학이 있었는데요, 이것을 조선 5대 서원이라 부릅니다. 영주 소수서원, 달성 도동서원, 안동 도산서원, 경주 옥산서원 그리고 이 병산서원이 그 주인공입니다.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은 그 구조가 복잡하여 명쾌하지 못하고, 이언적의 옥산서원은 계류에 앉은 자리는 빼어나나 서원의 터가 좁아 공간운영에 활기가 없고, 조식의 덕천서원은 지리산 덕천강의 깊고 호쾌한 기상이 서렸지만 건물 배치간격이 넓어 허전한 데가 있으며, 김굉필의 도동서원은 공간배치와 스케일은 탁월하나 누마루의 건축적 운용이 병산서원에 미치지 못한다

 

 

이에 비하여 병산서원은 주위의 경관과 건물이 만대루를 통하여 흔연히 하나가 되는 조화와 통일이 구현된 것이니, 이 모든 점을 감안하여 병산서원이 한국 서원 건축의 최고봉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권

 

 

 

 

 

 

선생은 병산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4Km의 비포장길은 무조건 걸어라고 하십니다. 근데 걷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저도 서너번 갔었는데 입구까지 그냥 차로 쌩~~ 하고 갔더랬습니다. 중간에 잠깐 차를 멈추고 주위를 돌아본 적은 있습니다만. 선생이 걸어라고 하실 땐 이유가 있을 겁니다. 걸어봐야 아~~~ 하고 그 이유를 알게 될 겁니다. 언젠가는 온전하게 그 길을 한번 걸어볼겁니다.

 

 

 

 

걸어봐야 보이는 낙동강과 그 주변의 풍광

 

 

 

 

서원의 가장 큰 기능은 물론 대학이라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지만, 서원을 세운 분의 제사를 모시는 곳이기도 합니다. 전학후묘前學後廟. 앞에는 교실, 뒤에는 제사를 모시는 사당, 즉 교실인 입교당이 중심에 있고 뒷편에 서애 유성룡 선생의 위패를 보시는 존덕사가 있습니다. 도서관인 장판각도 교실과 좀 떨어진 뒷편에 위치하구요. 교실 앞 양쪽에는 기숙사인 서재와 동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쪽에 강당인 만대루가 위치합니다. 이런 서원의 배치가 FM입니다. 그 후 대부분의 서원들이 이런 배치를 따릅니다.

 

 

 

 

 

 

 

 

그리고 만대루입니다. 만대루가 있어 병산서원이 완성되었다고 하는, 유홍준 선생이 입에 침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하는 그 만대루입니다. 이거 설명이 안됩니다. 가 봐야 됩니다. 그리고 신을 벗고 만대루에 올라 앞산과 앞강과 모래와 뒷편의 입교당을 봐야 됩니다. 딱 가서 서 보면 그냥 무릎을 탁 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는 부석사 무량수전에 기대어 무량수전이 바라보는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선생은 말씀하셨는데요, 만대루에 올라 앉아 병산과 유유히 흐르는 낙동가의 풍광을 바라보는 것도 만만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원래부터 병산서원이 이 곳에 위치한 것은 아니고, 다른 곳에 있는 거를 유성룡 선생이 옮겨왔다고 합니다. 근데 어데 짓지 하고 보니까, 읍내에 지으면 요것들이 공부도 안하고 엄한 짓을 할까 싶어 이렇게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까지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대루는 학교 강당입니다. 전체 강의도 하고 학교 행사가 있을 때 이용하기도 합니다. 근데 여기서 공자왈 맹자왈이 잘 될까요???? 이렇게 풍광이 기가 막히는 곳에서??? 공부가 될 리가 없습니다. 이거는 무조건 삽겹살에 쏘주입니다. 그리고 가야금 타는 언니들, 안주 먹여주는 언니들도 좀 부르고.... 널찍허니 딱 좋습니다. 아마도 안동읍내에서 차 대절해서 보도방 언니들이 올 겁니다. 그리고 술 먹다가 좀 지치면 삼월이랑 앞의 낙동강 모래밭에 나 잡아봐라~~~~ 도 좀하고... 얼큰하게 취할라 치면 언니랑 뜨겁게 응응........ 낼 아침 북어국도 만대루에서.... 아웅~~~ 부러워~~~ㅋㅋㅋ

 

 

 

 

 

 

 

 

5. 방에 앉아서 아침 밥상을 받는 곳 - 해남 유선관

 

 

 

여기 중동의 사막 오지에 있는 직원들끼리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아우~~ 이렇게 졸라 고생해봐야 전부 마누라 좋은 일 시키는 거 아니가......" 맞습니다. 여기서는 돈이 있어도 쓸래야 쓸 수도 없습니다. 밥주지 옷주지 술주지.... 좀 괜찮은 언니라도 만날라 치면 230Km 떨어진 압다뷔 시내꺼정 나가야 하니 귀찮아서도 잘 안나갑니다.

 

 

그렇습니다. 아내는 지금 전성기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대가 덕을 쌓으면 자식이 의사가 되고 삼대가 덕을 쌓아야 주말부부가 된다고 하는데, 이건 주말부부도 아니고 아예 신랑은 산 넘고 바다 건너 저 먼곳에 나가있지, 돈은 꼬박꼬박 잘 벌어오지.... 당연 그 생활이야 아내의 친구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그것입니다. 근데 아내는 "나는 그럴 자격이 있다" 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연년생의 아이를 낳아 키우고 또 얼마 안되어 세째를 가지고.... 저는 그 시절에도, 아니 오히려 그 시절이 더 행복했다고 느끼는데 아내는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그 시절의 아내 사진을 보니 알 만 합니다. 핼쓱하다 못해 경상도 말로 핼갔습니다. 그런 참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고 이제는 세째도 학교에 잘 다니고, 키우기 힘들어 했던 그 연년생들은 너무나 밝게 잘 자라고.... 아내로서는, 머 솔직히 인정은 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의 이런 자유롭고 풍요로운 생활은 누릴 작격이 충분히 있다고 하는 그 말이 이해가 됩니다. 그런 힘든 그 시절에 아내가 가끔 했던 말이 있는데요.... .

 

 

"앉아서 밥상을 한번 받아 보고 싶어......"

 

 

 

 

 

 

아마도 기억에 막내가 아내 뱃속에 있을 때 여기에 간 것 같습니다. (확실치는 않습니다. 총명하던 나는 예전에 도망가고, 요즘은 걸그룹 언니들 이름도 제대로 기억 못합니다. 마눌한테 함 물어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땐 아마도 어린 연년생과 뱃속에 또 한 아이까지 데리고 가서 유선관의 운치를 제대로 느끼기엔 아내나 나나 마음의 여유가 그닥 많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해남의 유선관遊仙館은 그 이름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신선이 노는 집. 지어 질 때 부터 여관으로 지어졌고, 딱 100년 된 여관이며 두륜산 기슭에 있고, 여관 주위로 계곡이 흐르고, 조금만 걸어가면 대흥사가 있는 그런 입지이니, 운치야 머 두말 할 것도 없습니다. 신선놀음이겠지요.

 

 

좀 찾아보니 지금의 주인장은 5번째라고 합니다. 그 전에는 장화라는 멋진 기생이 오랫동안 여관을 운영했다고 합니다. 문화유산답사기 1권에 나오는 그 누렁이는 그 때의 이야기입니다. 얼마전에 1박2일에 한번 나오고 나서는 쌩씨껍을 해서 주인장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고 합니다. 촬영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는데, 관에서 하도 지역 갱제를 살리야 되니 우짜니 카고 막 압박이 와서 어쩔 수 없이 하긴 했는데, 그러고 나서 한동안 유선관고 주인장도 꽤 긴 몸살을 앓았다고 합니다. 알 꺼 같습니다. 주인장의 심정을......

 

 

저기에 함 가서 묵어봐야 되겠다고 생각한게 물론 답사기 책의 영향도 있었지만,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박상민이 애인 오연수와 이 곳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보고 나서였습니다. 참 어린 시절의 추억의 영화입니다....ㅎㅎ

 

 

 

 

여기 가면 방에 딸린 화장실 샤워실 이런 거 없습니다. 방에 테레비 컴퓨터 이런 것도 없습니다. 방에 8폭 병풍은 있습니다.....ㅋㅋ 어떤 아는 이가 좀 조용하게 여가를 보내려고 템플스테이를 갔었는데 방에 TV며 컴퓨터며, 하물며 와이파이까지 다 잡혀서 애들 데리고 머할라고 여기까지 왔냐고 불평을 했다능... ㅋㅋ

 

 

어린 아이 둘을 데리고 유선관에서 묵었더랬습니다. 저녁상과 아침상을 방에서 받았습니다. 아내는 행복해 했습니다. 참 소박합니다.

 

 

작년에 아이들 모두 데리고 일본에 가족 여행을 갔었습니다. 좀 큰 맘먹고 아마가세 온천의 산소텐스이(천수산장)이라는 전통료칸에 이틀을 묵었던 적이 있습니다. 가격이 만만찮았는데, 근데 정말 좋았습니다. 말 그대로 잘 대접받았습니다. 비싼 숙박비가 전혀 아깝지 않았습니다. 그 때도 우리 가족들만의 밥상이 따로 차려져 나왔더랬습니다.

 

 

유선관은 아내와 단둘이서 다시 한번 가 볼 요량입니다. 아이들 다 떼놓구요. 유선관의 운치를 제대로 느낄 수 있도록.....

 

 

 

 

유선관의 아침상입니다. 마늘 장아찌 4개.....ㅋ 단촐하고 소박합니다. 아래 사진은 유선관 뒷편의 장독대입니다. 밥상이 맛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6. 나는 탑에게 절을 했습니다 - 안동 조탑동 전탑

 

 

 

 

 

안동 조탑동에 도착했을 무렵은 해가 막 서산너머로 질락 말락 할 때였습니다. 내비도 없던 때라 대충 그 동네가 가서 벌써 어둠이 내려 앉아 어수룩해진 들판 사이에서 탑을 찾았습니다. 탑은 정말 들판에 홀로 덩그러이 서 있었습니다. 외로워 보였습니다. 그러나 위엄이 있었습니다. 당당한 포스를 뽑냈습니다. 땅거미가 질 무렵의 홀로 서 있는 탑은 그렇게 경이롭게 다가왔습니다. 아주 오래된 일이지만 아직도 탑이 나에게 준 인상은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여기서 찍은 사진이 어디 굴러다니는 걸 봤는데 막상 찾으려니 없습니다. 마눌님... 함 찾아봐봐줘~~~)

 

 

 

 

 

 

조탑동 전탑에서 가장 인상적이라는 감실을 지키는 인왕상입니다. 책에서는 폼은 저렇지만 꿀밤도 때리지 못할 졸라 귀여운 인왕상이라고 했는데요.... 음..... 생각만큼 썩 귀엽지는 않습니다.ㅎ 머리가 커서 인왕상 대갈협회 회장님 정도는 출마해도 될 것 같습니다.ㅎ

 

 

조탑동 오층전탑은 전탑의 고장 안동의 상징이다. 전탑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거했으면 동네 이름조차 조탑동이 되었을까. 안동역전에 있는 동부동 오층전탑, 임청각 옆에 있는 법흥동 칠층전탑과 함께 이 지역의 고집스러운 '전통고수의 전통'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통일신라시대에 전국이 화강암 삼층석탑을 취하고 전탑이나 모전석탑을 버렸을 때 이 니껴형 북부경북에서는 오히려 전탑을 발전시켜 우리나라 탑파의 역사에서 별도의 한 장을 만들게 했으니 그 고집으로 문화의 다양성을 확보했다는 것은 오늘날 지방문화의 창달에 큰 시사점을 던져준다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권

 

 

탑은 원래가 부처님의 사리를 보관하는 곳입니다. 그 왜... 갈 곳 없는 정액들이 굳고 또 굳어서 만들어 진다는 그 사리....ㅋㅋ 사리를 그냥 땅에다 묻는 것이 좀 멋적어서 그 위에다 탑을 만들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탑이란게 절의 앞 마당에 보기 좋으라고 만든 것이 아닙니다. 물론 조형미가 뛰어난 탑이 없는 절은 상상이 잘 안되긴 하지만요...... 그러니까 탑에다 절해도 부처님께 절하는 것과 비슷한 효과가 날 테지요. 저는 불자는 아닙니다만 절에 가면 대웅전에 가서도 빌고 탑을 보고도 빕니다. 여기서는 코란을 보고도 빕니다. 마눌이 좀 싸근싸근해지라고...ㅋㅋ

 

 

처음엔 탑을 나무로 만들었겠지요. 만들기 수월하니까요. 그런데 이게 얼마 못가서 불에 타거나 아니면 자연에 훼손이 쉽게 되니까 벽돌을 쌓아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질 좋은 화강암이 많이 나니까 돌을 찧어서 만들거나 그 돌을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서 탑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재료로서 굳이 구분을 하자면 목탑, 전탑, 모전석탑, 석탑 뭐... 이렇게 나누기도 합니다.

 

 

 

 

울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탑이자 목탑형식을 취한 석탑인 익산 미륵사지 석탑입니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양식을 잘 보여주는 탑입니다.

 

 

 

 

경주 분황사의 모전석탑입니다. 이름 그대로 돌을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 만든 탑입니다. 여기도 감실을 지키는 인왕상이 있네요.....

 

 

전탑은 현재 5기가 남아있다고 하는데요, 그 중 3기가 여기 안동에 있습니다.

 

 

 

 

안동역 주차장 뒷편에 있는 동부동 오층전탑입니다. 예전에 갔을 땐 정말 어디에 처박혀 있다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로 아무렇게나 있었는데, 지금 사진을 보니 주변도 좀 정리가 되고 제대로 나도 탑이여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임청각이라고 우리나라 5대 고택중의 하나인 고성 이씨 종택이 안동에 있습니다. 살림집임에도 불구하고 방문객을 위해 항상 개방하는 마음씨 좋은 집이라고 책이 씌여 있었는데 제가 갔을 땐 주인 어른이 장 보러 가셨는지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여하간, 그 임청각 옆에 있는 법흥동 7층 전탑입니다. 바로 옆으로 철도가 지나가는 참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꿋꿋하게 천년을 버텨온 탑입니다. 가서 보면 장대합니다. 사진은 별로 그렇지 않다구요??? 그럼 이 사진은.....

 

 

 

 

탑 얘기를 하느라... 좀 길어졌는데요, 조탑동에 가면 꼭 봐야 되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권정생 선생이 살았는 곳이 바로 여기 안동 조탑동입니다. <강아지똥> <몽실언니> 등으로 유명한 권정생 선생의 일화는 참 많습니다. 처음 아동문학가로서 상을 받으러 갔을 때 무릎 나온 바지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갔다던가, 평생 교회 종지기로 사셨다던가, 위의 두책이 백만권이 넘게 팔려 수입이 넉넉했음에도 불구하고 움막같은 집에서 평생 가난하게 글쓰기로 일생을 마쳤다는 그런 정말 슬픈 동화같은 이야기들입니다.

 

 

자신의 재산과 앞으로 들어올 인세 모두도 북의 아이들을 위해서 써라고 하셨던,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건지, 당신이 생각하시던 바를 몸소 보여주신 분입니다. 선생의 삶 그대로 살지는 못하지만 선생이 말씀하시려고 했던 그것은 평생 기억하며, 또 실천하며 살겠습니다. 존경합니다.

 

 

 

 

죽으면 화장하고 집도 불태워서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고 아무것도 짓지 마라 라는 선생의 유언때문인지, 안동에 돈이 없어서인지, 선생이 가신 지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아직 선생의 작은 기념관조차 없습니다. 지금 안동에서 그것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고 하니 좀 더 기다려 봐야 되겠습니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은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를 어린이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만약에 관리하기 귀찮으면 한겨레신문사에서 하고 있는 남북어린이 어깨동무에 맡기면 된다. 맡겨 놓고 뒤에서 보살피면 될 것이다.

 

 

유언장이란 것은 아주 훌륭한 사람만 쓰는 줄 알았는데 나같은 사람도 이렇게 유언을 한다는 것이 쑥스럽다. 앞으로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좀 낭만적으로 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전에 우리집 개가 죽었을 때처럼 헐떡헐떡 거리다가 숨이 꼴깍 넘어가겠지. 눈은 감은 듯 뜬 뜻 하고 입은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같이 죽을 것이다.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본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 저기 뿌려주기 바란다.

 

 

유언장 치고는 형식도 제대로 못 갖추고 횡설수설 했지만 이건 나 권정생이 쓴 것이 분명하다. 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 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 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 봐서 그만 둘 수도 있다. - 2005년의 권정생 선생 유언장

 

 

 

 

 

 

7. 윤씨부인이 심란할 때 자주 들르는 곳 - 구례 연곡사

 

 

 

박경리 할매의 <토지>는 최고의 대하소설이라 불립니다. 그 책을 읽어야지 하면서도 무려 스무권이 넘는 분량때문인지, 소설 자체가 주는 중압감때문인지 선뜻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할매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아~~ 할매 지송함니더, 꼭 읽겠습니더... 카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토지는 대하 역사소설이긴 하지만, 근데 이거.... 자세히 보면 웬만한 막장 드라마 저리가라입니다. 서희의 할매 윤씨부인은  과부였는데, 동학장군에게 겁탈은 당해서(소설에서는 이렇게 나오지만 저는 서로 눈이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명색이 동학장군인데, 아무리 급했기로서니 절에 공양드리러 온 쭈글쭈글 아줌마를?? 함 몬주서 안달이 여인네들이 주위에 빠글빠글 했을 텐데... 이거는 둘이 한눈에 딱 반한거죠...) 그래서 서희 할매는 서희 저거 삼촌을 낳고, 그 삼촌은 커서 저거 형수랑 바람이 나서 야반도주를 합니다. 소설에서는 서희 삼촌 구천이와 서희 엄마이자 구천이의 형수인 별당아씨의 사랑이 아주 가슴 아프게 나오는데요, 뭐.... 불륜입니다. 그것도 친족간의.... ㅋㅋㅋ

 

 

서희 할매인 윤씨부인이 구천이를 잉태했던 , 그리고 머리 아픈 일이 있을 때마다 자주 들러던 절, 구천이와 별당아씨가 눈에 하트를 뿅뿅뿅 그리면서 도망가서 숨어 지내던 절, 서희의 신랑인 길상이가 자란 절이 바로 이 연곡사입니다. 꼭 유홍준 선생의 승탑이야기가 아니라 하더라도 토지를 읽었어면 응당 한번 가봐야 되는 그런 절이었습니다.

 

 

재작년인가 엄니 아부지를 보시고 지리산에 갔더랬습니다. 짬을 내어 피아골에도 가보고, 연곡사에도 들러 아름다운 승탑도 보고, 내려오면서 최참판댁도 보고 그랬습니다. 지리산 언저리는 언제 가봐도 실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연곡사는 단아하다는 표현이 딱 맞는, 소박하고, 주위 풍광과 잘 어우러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윤씨부인이 심란할 때 자주 들를 만 했습니다.

 

 

 

 

지리산 피아골 가는 길의 단풍입니다. 연곡사는 그 길의 언저리에 있습니다. 특히나 가을에는 참 아름다운 길입니다.

 

 

연곡사에 대해 좀 살펴보니 아주 정말 고난의 절입니다. 임진왜란 때 훼손되고 다시 짓고, 구한말에는 의병의 근거지라고 일본넘들이 다 뿌수고, 그래서 다시 짓고, 그러다 625때는 피아골 전투로 아예 훼손 정도가 아니라 거의 없어지는 수준까지.... 그러다 1965년에 다시 석등에 불을 밝히고 83년도에 대웅전을 짓고... 그러니까, 나 절이야. 절 마저, 라는 대략의 형태를 갖춘 것은 최근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는 국보 2점 보물이 4점이나 있는, 보물 창고같은 절인데요, 바로 승탑의 보고입니다.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것이고, 스님의 사리를 모시는 것이 승탑입니다. 요새는 스님들이 혹시 머 사리가 안 나올까 싶어 공개 다비도 잘 안한다고 합니다만....ㅋ

 

 

유홍준 선생이 채점을 해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승탑들이 여기 있습니다. 동승탑과 북승탑이 그 주인공입니다. 물론 국보이기도 하구요. 본래 승탑이란게 사리 주인인 스님의 이름을 딴다고 하는데요, 어느 스님인지 모른댑니다. 도선국사 꺼가 아닌가 하고 짐작만 한댑니다.

 

 

 

 

 

 

요것이 울 나라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동승탑입니다. 기품이 있어 보입니다. 전문가들로부터 A+ 점수를 받았습니다. 승탑계의 석가탑입니다.

 

 

 

동승탑과 사모님입니다. 묘하게 어울립니다.

 

 

 

 

북승탑이라고 불리는 현각선사 승탑입니다. 동승탑이랑 거의 똑같이 생겼습니다. 다른 그림 찾기에 나올 법 합니다. 이것도 국보입니다.

 

 

 

 

이것은 서쪽에 있어 서승탑이라고 불리는 소요대사 승탑. 다 생긴게 비슷해서.... 근데 좀 푸근한 맛은 있습니다. 보물입니다.

 

 

 

 

주위에는 이름없는 승탑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무렇지고 않게 서 있는 저 승탑들이 오히려 앙증맞고 더 눈이 갑니다.

 

 

쌍봉사 칠감국사탑은 큰 영광을 얻은 분의 모든 것 같고, 실상사 증각국사탑은 듬직한 큰아들 같고, 태안사 적인선사탑은 정숙한 며느리 같고, 보림사 보조선사탑은 능력있는 사윗감 같은데, 연곡사 사리탑은 귀엽게 자란 막내딸 같습니다.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권

 

 

 

 

 

 

 

그 재작년인가...의 사진을 찾아보니, 있습니다. 한 이삼년만에 한번씩은 이렇게 가족 전체가 모여 어딘가에서 만나는 것 같습니다. 2012년 가을입니다. 사진은 지리산의 어느 호텔 주차장인듯 합니다. 엄니 아부지와 누나네 식구, 동생네 식구, 그리고 우리 식구입니다. 강이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군요...ㅋㅋㅋ  부모님 살아 생전에 이런 여행을 몇번이나 더 할 수 있을까요..... 분발하겠습니다.

 

 

 

 

 

 

8.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여유로운 유배지 - 강진 다산초당

 

 

 

역사에서 가정법은 부질없는 짓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번쯤 가정을 해 볼 법한 그런 장면들이 있습니다.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하였다면,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군을 돌리지 않았다면, 김구가 개미지옥 같은 서바이벌에서 이승만보다 한발 빨리 움직였다면, 맥아더가 중국에다가 핵 폭탄을 한방 쐈더라면, 김영사미와 김대중이 손을 좀 빨리 잡았더라면, 재인이 아재가 정권을 잡았더라면 등등....

 

 

그 중에서도 정조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래서 정약용이 나라를 제대로 한번 다스려봤으면 하는 가정은 언제나 아쉽습니다. 조선 초기에 세종이 있었다면 후기에는 정조가 있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한번 더 점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정조 사후 정순황후는 정조가 그 오래동안 만들어 놓았던 것을 단 오년만에 정조 이전으로 돌려 놓고 맙니다. (김여진이가 그 역할을 했었던 적이 있는데, 좋아하는 배우였지만 그 땐 어찌 그리 밉던지.....ㅋ)

 

 

 

 

정약용 선생은 제가 아는 역사의 인물 가운데 가장 똑똑한 냥반입니다. 안 도통한 분야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조선의 천재입니다. 거기다가 자상하고 어질기까지 합니다. 1800년에 정조가 죽고 그 이듬해인 1801년 신유박해를 계기로 유배생활을 시작합니다.

 

 

정약용의 큰형 악현의 사위인 황서영이 긴 편지를 적습니다. "울나라는유 천주교 믿는 사람들을 나라에서 졸라 갈궈요. 죽겠시유. 막 때리유. 죽을 때까지.... 그러니깨 그 머시냐 신부님 쫌 많이 보내주시구유 청나라한테 얘기해서 울나라한테 공갈도 좀 치라구 그러슈. 이제 좀 그만 갈구라구유... 이도 저도 안되면 그냥 프랑스 군대를 쫌 보내라구 그러세유" 머 이런 내용의 편지였는데요, 북경의 천주교 주교에게 갖다 줄려다 그만 들키고 맙니다. 이게 황서영의 백서 사건인데요...

 

 

이런~~ 처 죽일 놈들.... 정부에서는 국정원 애들 모두 가동시켜 줄줄이 비엔나로 엮습니다. 세째형 약종 사형, 매부 이승훈 사형, 조카사위 황서영 당근 사형, 정약용은 어디? 응? 벌써 유배중이라구?? 데리고 와서 목 따는 것도 귀찬여. 더 오지로 보내버려!!! 그래서 강진으로 오게 됩니다.

 

 

 

 

선생은 여기서 심심했을 겁니다. 무지~~~ 그러니까 할 일도 엄는 천재가 시골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책을 씁니다. 졸라 씁니다. 행정개혁(경세유표), 관료개혁(목민심서), 법제개혁(흠흠신서)등 무려 500권이 넘게 책을 쓰면서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이룹니다. 하긴 얼마나 심심했으면 흑산도로 유배간 둘째형 약전은 바닷가 물고기만 보다가 물고기에 대한 책을 씁니다.(자산어보)

 

 

제가 느낀 강진땅과 다산초당은 참 아름답고 여유로운 곳이었습니다. 이런 곳이라면 유배생활도 함 해볼 만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유배중에 자식들도 여기까지 불러서 공부도 가르쳤다고 합니다. 음.... 역쉬나 다릅니다. 저 같으면 강진땅의 예쁜 언니들부터 찾았을텐데...ㅋㅋ 

 

 

 

 

초당 위쪽에 있는 정자에서 본 강진땅입니다. 풍요롭고 여유롭습니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가는 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선에 뽑힐 만큼 그 뛰어난 풍광을 자랑합니다. 동백나무 숲이 볼 만 합니다.

 

 

 

 

백련사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참 고즈늑한 절이었는데, 오래된 이야기라 지금은 또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절임에도 여러 종류의 차를 팔았다는 기억이 있습니다.

 

 

 

 

초당근처의 다산유물전시관입니다. 전에는 이런 거 없었습니다. 아님 있었는데 못 봤나??? 아니면 강진땅을 밟은 지가 벌써 그렇게 오래 됐나??? 아이들 데리고 오랜만에 함 나들이를 해야겠습니다. 예전에 초당에 올라가는 길에 귀여운 석상 두기가 있었는데 거기서 산이와 들이가 꼬마일때 석상 포즈를 취하며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표정과 포즈가 너무 앙증맞아 기억이 선명하게 나는데요, 막상 어디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시간을 두고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옛 사진을 만나면 반가울 것 같습니다.

 

 

 

 

 

 

9. 은거와 유배를 기념하는 건축물 - 제주 대정리 추사관

 

 

 

얼마나 큰 죄를 지었으면 제주도까지 귀양을 왔을까요. 머 별로 큰 죄도 아닌것 같은데... 예전에 제주도로 유배되면 유배지까지 가는 것이 큰 시련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처럼 휑하니 가는 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유배 가다가 절반은 제주도에 도착도 못하고 그냥 물고기 밥이 되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고 하는데요. 하기사 지금도 제주도 가다가 배가 뒤집혀 수많은 사람들이, 한창인 아이들이.... 에휴.... 말하면 입만 아프고 가슴만 답답합니다만.....

 

 

추사 김정희가 무사히(?) 유배되어 9년동안 살았던 곳입니다. 그 시간에 추사체도 완성하고 세한도도 그립니다. 앞서 정약용 선생도 그렇고, 일단 뭔가를 완성하려면 유배를 가야 되는가 봅니다. 하기사 김대중 대통령도 가택연금시절에 수 많은 책을 읽으면서 지도자의 기초가 되는 지식과 교양을 쌓았다고 하니..... 사실 저도 중국 유배시절에 참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만, 지금의 중동 유배에는 드라마만 줄창 보고 있습니다. 직원들끼리 드라마 이야기가 아니면 별 다른 주제가 없습니다. 대화에 끼려면 드라마 봐야됩니다.ㅋㅋㅋ

 

 

 

 

제주 대정리 추사 유배지 앞에 있는, 기계로 찍어 내는 것이 아닌, 이젠 정말 몇 남지 않은 오리지날 돌하르방. 흉내내기 대마왕 막내 강이의 삼상치 않은 포스. 눈에서 레이저 광선 나올라고 함.ㅋㅋ

 

 

 

 

강진에서 읍내의 단란주점에도 들러고 하는 좀 자유로운 정약용의 유배생활과는 달리 김정희는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위리안치라는 벌을 받았습니다. 유배의 시작이 55세이니, 할배가 밖에도 몬나가고, 아는 사람도 몇 없고, 입맛도 안 맞고... 할배 성격도, 모든 천재가 그러하듯 좀 까탈시러워셔서, 참 힘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아마도 입술을 꽉 깨물고 천개의 벼루와 천개의 붓이 닳아 없어져서 완성했다는 추사체를 만들어냅니다. 인간승리에 박수입니다.

 

 

 

 

추사가 유배 생활을 한 그 유적지도 유적지지만, 사실 관심이 더 가는 것은 바로 선생의 기념관인 추사관입니다. 유홍준 선생이 문화재청장으로 있을 때 자신이 직접 기획한 프로젝트인데요, 동네 사람들도 저 건물이 뭔지 잘 모른다는 그 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하였습니다. 예전에 유홍준 선생의 집인 수졸당을 승효상 선생이 설계했을 때도 유선생은 '내 돈 엄따'며 BJR전법(일명 배째라 전법)으로 이로재라는 현판 하나를 딸랑 주고 설계비를 퉁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승효상의 설계사무실 이름이 이로재입니다) 요번에도 아마 새한도 짝통 하다 갖다 주고 설계해내라고 쌩 땡깡을 부린게 분명합니다.

 

 

제주 추사관은 전시실을 지하에 배치하고 위층은 <세한도>에 나오는 건물처럼 아무런 치장이 없는 단아하고 정중한 건물이다. 사람들이 꼭 감자창고 같다고 말하는 소박미가 있다.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권

 

 

설계자의 말을 들어 볼까요....

 

 

일반적 기념관에 비하면 추사관의 건축은 4백평이 되지 않는 비교적 작은 규모지만, 추사관이 놓이는 장소와 유배 살던 집을 감안할 때 대단히 큰 볼륨일 수 밖에 없다. 만약 이 규모가 지상에 그대로 노출된다면 대정읍성 성벽과 유배 살던 집은 물론이고 인근의 작은 집들을 압도하는 건축으로 대두될 것이며 이는 유배 당한 이를 기리는 목적에 반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볼륨을 지하에 묻어 형태를 나타내지 않는 것이 타당하며, 그래야 은거와 유배를 기념하는 건축으로서도 더욱 설득력이 있다.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권

 

 

 

 

설계자의 의도가 정확하게 나타난 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딱 봐도 나 전시관이야! 하는 건물에 비해 훨씬 소박하고 정감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감자창고라고 부를 만 합니다. 김원 건축가가 설계한 태백산맥 문학관에서도 참 좋다 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 건물에서도 역시 음~~ 좋타! 라는 느낌이 팍 왔습니다. 지방에 생기는 전시관, 박물관, 혹은 기념관 같은 것은 관에서 설계비 좀 팍팍 써서 잘 지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건물들은 무언가를 담는 그릇이지만, 그릇 자체가 좋고 예쁘면 그 무언가는 더 빛이 나게 되는 법이니까요.

 

 

전시장 안에 들어가면 첫번째로 만나는 건 새한도입니다. '날씨가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 것을 안다' 는 공자의 말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만든 작품이겠지요. 맞습니다. 유배생활을 시작하고 나서야 저도 가족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번씩 마누라에게 하면 꼭 한마디 거드십니다.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하라구~ 응!!!"

 

 

 

 

제주에서의 유배가 끝나고 선생은 또 북청으로 유배를 가십니다. 이건 뭐... 유배의 극과 극을 보여 줍니다. 모든 유배가 끝나고 선생은 과천과 서울 강남의 봉은사에서 말년을 보내십니다. 이 봉은사 판전 현판은 기교를 감추고 서툰 것을 존중하는 작품이라고 평가받습니다. 대교약졸大巧若拙 뛰어난 기교가 서툴게 보인다는 문구의 본보기입니다. 선생은 이 글씨를 쓰시고 3일후에 71세의 일기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지하에서 1층으로 올라오면 만나는 화가 임옥상 선생의 추사 흉상입니다. 책에서 승효상 선생은 자신이 기껏 비워 놓은 공간을 채워 놓은 역작이라고 평가하면서 이 때문에 추사관에 온 사람들은 승효상은 기억 못하고 임옥상만 기억하겠다고 푸념합니다. 근데 괜한 걱정입니다. 사람들은 누가 건물을 지었는지, 흉상을 만들었는지 별 관심이 없습니다. ㅋㅋㅋ

 

 

 

 

 

 

10. 아~~ 이 구라쟁이 할배한테 속았습니다 - 일본 다자이후 대야성(오오노조)

 

 

 

이번 휴가는 가족들 다 해외로 함 가자!!!

 

 

근데 어디 가지? 유럽? 필리핀? 베트남? 아내는 겨울이니 일본에 가서 따뜻하게 온천을 하자고 합니다. 콜!!!! 일본에서 넘어 온지도 10년이 넘었고, 저도 한번 가 보고 싶었습니다. 여행 계획을 잡습니다. 메인은 온천이고, 그렇담 히로시마에 들러 친구인 호시노도 보고 처음 내 손으로 지었던 히로시마 대학도 가 보고 싶었습니다. 음~~ 이게 다야?? 아니지... 유홍준 선생의 일본 답사기가 있잖아!!!

 

 

또 열심히 답사기를 읽어봅니다. 근데 응?? 백제가 멸망하고 백제인들이 넘어 와서 쌓은 성이 있다고?? 그래 여기를 가보는 거야... 근처에 아이들 공부 잘하게 해달라고 빌면 무조건 들어주는 유명한 신사도 있다고?? 콜!콜!!!

 

 

그래서 7일 일정의 여행 첫날 하카다에서 바로 다자이후시로 이동합니다. 그 유명한 덴만궁으로 고고싱~~~

 

 

 

 

여기가 바로 덴만궁입니다. 아.. 싸모님 포즈 좋으시고.... 이 덴만궁은 일본 역사를 통털어 가장 공부를 잘 했다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라는 냥반을 모신 신궁입니다. 덴만궁이라는 이름의 신사는 전국에 여러개 있는데 여기 다자이후의 이곳이 덴만궁의 총 본산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퇴계 이황 선생을 모신 도산서원쯤 됩니다.

 

 

그래서, 저거 아~들 공부 안하고 농땡이 부리는 것은 안 탓하고 무조건 여기와서 빌면 시험에 합격한다고 믿는, 울나라 엄마들과 정말 똑같은 일본 엄마들이, 그리고 학생들까지 졸라 와서 비는 곳입니다.

 

 

 

 

으흠.... 그럼 나도 빌어야지.... 아이들 공부야 머 지가 하는 거고, 또 머 공부 잘한다고 행복해지거나 출세하는 세상도 아니고.... 내가 비는 것은 딱 한가지....  그저 마눌님이 예쁘지고 나한테 이쁜 짓 좀 많이 하게 해달능......ㅋㅋㅋ 근데 울 큰아들넘은 멀 이렇게 열심히 빌었을까???

 

 

그리곤 안내소에 들러 여러가지를 물어봅니다. 백제인들이 쌓았다는 수성(미즈키)과 대야성(오오노조) 가는 길도 물어봅니다. 수성은 여기서 바로 가는 건 없어.... 버스타고 쪼기 가서 내려서 요렇게 저렇게 가댜 돼. 대야성? 이거는 여기 바로 뒷동산이야... 걸어서 금방 올라가.... 정말??? 얼마나 걸려?? 니는 젊으니까 한 삼사십분이면 올라갈껄... 오호~~ 얘들아 금방 간단다... 신발 끈 동여메고 출발!!!!

 

 

근데 왜 백제 사람들이 여기까지 와서 성을 쌓았을까요??? 계백 장군이 '이기 미친나?? 죽을라 카모 니만 죽지 내하고 얼라들은 와?? 나는 그래 몬한다... 잘 묵고 잘 살끼다!!' 라고 앙탈을 부리던 마누라 김선아를 내리치고 장렬하게 전사하고 나서  백제가 망했지만, 백제 잔당들이 많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 잔당들이 숨을 죽이고 힘을 키워서 졸라 신라 너거 한판 더 붙자!! 라고 한게 지금의 금강 하류의 백촌강 전투입니다.

 

 

신라가 졸라 비겁하게시리 당나라를 끌여들여 한패로 하니까 백제도 일본보고 쫌 도와도 캐서 일본도 흔쾌히 그래 도와주꾸마 함 지대로 붙어보자 하고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과 백제와 일본의 연합군이 씨게 붙었는데 결과는 아주 대 참패.... 그리곤 백제의 귀족과 백성들이 일본에 도망와서 혹시나 저노무 나당넘들이 일본까지 쳐들오 올까 싶어서 수성과 대야성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물론 답사기책에서요...ㅎㅎ

 

 

사실 우리는 학교에서 배운 게 왜구는 노략질만 하는 나쁜 넘이라고 배웠는데 실제 이 시대때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는 무슨 사연으로 백제를 끝까지 그렇게 지원했고 우리 국사 교과서는 왜 이에 대해 침묵하는가. 박노자는 '숙적' 왜국이 이렇게 백제를 지원했다는 사실이 한국인의 통상적 일본관과 배치되기 때문에 언급을 아예 회피하고 있다고 보았다. (중략)

 

 

백제와 고구려는 서로 왕을 죽이면서까지 싸웠다. 반면에 백제와 왜는 단 한번도 싸운 적이 없다. 백제는 왜에 문명을 전해주었고, 그 대신 수시로 군사적 지원을 받는 맹방이었다. 우방도 그런 우방이 없을 정도로 친했다. 왜는 가야의 철기문화를 받아들여 비약적인 문명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야와 함께 신라에 쳐들어가기도 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편이고 왜는 외적이었다는 선입견이 있으면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삼국시대라 부르는 시기는 사실상 오국시대였다.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1권

 

 

 

 

그렇게 그 언니가 말한 뒷동산으로 출발합니다. 올라 가는 도중에 토리이도 있습니다. 갈 수록 산은 점점 험해집니다. 사람은 구경도 못합니다. 숨을 헐떡헐떡 내쉬는 애들이랑 사모님을 다독거리며, 삼십분을 올라가도 한시간을 올라가도 성터 같은 것은 안보입니다. 드디서 사모님 짜증을 내기 시작합니다. "으 이기 머하는 짓이고?? 일본 여행 첫날에 등산하로 왔나!!!" 아 쒸바... 아까 그 안내소 언니가 막 미워질라 그럽니다.

 

 

 

 

그렇게 한시간여 남짓을 올라가니 답사기 책에서 나온 사진이랑 비슷한 곳이 나옵니다. 딱 요 앵글입니다. 그런데 머 성터의 돌이나 이런 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저 여기가 성터였다는 것은 어렴풋이 추측이 됩니다.

 

 

 

 

아~~~ 드디어 찾았습니다. 대야성터.... 다른 거는 정말 아무 것도 없고 "여기가 대야성터야... 그럼 됐지... 끝..." 이라는 딸랑 푯말 하나 있습니다. 허탈했습니다.

 

 

 

 

그래도 성터에서 누워도 보고 뜀박질도 하고.... 유홍준 선생도 실패했다는, 성터에서 다자이후 시내를 내려다 보는 조망도 실컷 감상했습니다. 좋았습니다.

 

 

성터를 한바퀴 돌고 나니 반대쪽에 큰 주차장이 있습니다. 아스팔트 도로도 나 았습니다. 머야 이거!!! 그럼 택시타고 바로 오면 되는 거였잖아!!! 아~~ 아내는 허탈해 합니다. 그럼 내려 갈 때는 차타고 가... 근데 지나가는 차는 한대도 안보입니다. 올 때는 산길로 올라 왔으니 내려 갈 땐 도로길로 내려갑니다.

 

 

 

 

다들 좀 힘들긴 했지만, 내려가는 도로길도 너무 아름답습니다. 차도 안다닙니다. 운치가 있습니다. 오히려 걸어왔다 걸어 내려가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도 가끔 이야기 합니다. 일본 여행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이었다고. 아마도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만한 장면일겁니다.

 

 

 

답사기 책에 나온 아름다운 곳은 물론 가 본 곳도 있지만 아직 못 가본 곳도 많습니다. 짬을 내어 갈 수 있는 곳은 가봐야지요. 가서 더 많이 보고 답사기도 더 많이 적고 싶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답사기책을 들고 평양의 부벽루나 금강산에도 갈 수 있는 날이 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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