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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야기

어디까지 가봤니? 울나라 건축물 10 - 조선 최고의 사립대학, 서원 건축 9선

 

조선 최고의 사립대학, 서원 건축 9선

 

 

 

 

예전에 카카오톡 대문사진에 위의 사진을 걸어 놓았더만, 정부장이 묻습니다.

 

 

"여그가 어디여?"

"조선 5대 서원이라고 알어? 그 중 하나인 도동서원이야..."

 "그럼 조선 5대 서원이 어딘데?"

"엉? 그것도 몰러??? 안동 도산서원, 병산서원, 달성 도동서원, 영주 소수서원, 그리고...... 하나는 어디지???"

 

 

갑자기 물어보니 퍼뜩 생각이 안납니다. 한때는 그런 것들을 줄줄 꿰고 다녔는데...... 하긴 머 3대 머시기니, 5대 저시기니 하는 것이 중요하겠습니까? 직접 가서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고, 건물이 가진 의미를 되집어 보고.... 그런 것이 더 의미있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어디 갈지 잘 모를 땐 저런 것도 도움이 된다능......

 

 

2012년에 문화재청에서 9개의 서원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잠정 등록했습니다. 아주잘 한 일입니다. 면면을 보면 조선 5대 서원인 퇴계 이황 선생의 도산서원, 서애 류성룡 선생의 병산서원,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도동서원, 최초의 사액서원인 회헌 안향 선생의 소수서원, 경주에 있는 회재 이언적선생의 옥산서원이 포함되어 있구요, 그리고 정여창의 함양 남계서원, 최치원의 정읍 무성서원, 논산에 있는 사계 김장생의 돈암서원, 전라도 장성에 있는 하서 김인후의 필암서원 등 4개 서원, 해서 9개의 서원이 그 주인공입니다.

 

 

자..... 그러면 언젠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지도 모르는 대한민국의 유서깊은 서원으로.... 출발하실까요????

 

 

 

1. 담장마저도 보물로 지정된 서원 - 도동서원 (대구시 달성)

 

 

경치가 좋은 곳에는 항상 그 경치를 감상하게끔 뭔가를 지어놓았다. 우리 조상들 풍류 빼면 시체다. 달성군 현풍에 있는 도동서원을 찾아갈라 치면, 여기서 반드시 한번 쉬어야 된다. 다람재에서 바라본 도동서원과 낙동강.

 

 

한훤당 김굉필(1454 ~ 1504)은 사림파의 적자라고 불립니다. 고려말의 정몽주에서 비롯된 정통 유학이 길재 - 김숙자 - 김종직 - 김굉필로 이어지는, 한마디로 조선 유학계의 성골인거죠. 이 양반이 이 동네에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합천으로 장가들어 함양군수로 있던 보스 김종직을 만나게 되죠. 소학을 무지 달달 외워서 소학동자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한훤당寒暄堂이라는 호는 그냥 춥고 더움을 나타내는 인사말이라고 하는 군요..... 우리 현장에도 호가 있는 친구가 있는데, 유유 김재한 과장이라고...... 이곳 현지 중국 여친의 이름이 유유라....ㅋㅋㅋ

 

 

도동서원 입구에 가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맨 윗 사진에 있는,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짐작도 안되는 은행나무랑, 여기 보이는 이 수월루이다. 사실 이 수월루는 애초 이곳에 서원이 들어섰을 땐 없었던 건물로 1855년에 창건되었다. 폼나는 서원이면 누각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지었는데, 지은 지 얼마되지 않아 불에 타서 없어지고 오랫동안 터만 남았다가 1973년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다른 건물의 담박함에 비하면 지나치게 기교적이라 도동서원의 품격이 흠이 된다. (나는 이 정도로 볼 눈이 없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에서 쓴 답사여행의 길잡이라는 책에 그렇게 씌여 있다. 그러고 보니 좀 위압적이라 생뚱맞기도 하다)

 

 

그 수월루앞에서 우리 아이들......

 

 

26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지만 그래도 공부만 합니다. 후학들고 가르치고요. 그러다 41세가 되어 6급 공무원의 길에 오릅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스승인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이 문제가 됩니다. 무오사화입니다. 사림파 훅 갑니다. 다행히 죽지는 않고 유배갑니다. 동문 친구인 정여창도 이 무오사화의 유배에서 죽습니다. 김굉필은 이 평안도 유배지에서 조광조라는 걸출한 제자를 만나 자신의 무공비급을 전수합니다. 그리고 무오사화가 일어난 지 6년 뒤, 연산군 이 미친 넘이 또, 엄마를 폐위하고 죽게 만든 놈들을 다 죽여 버릴거여 해서 일어난 갑자사화에서 결국은 사약을 받습니다.

 

 

도동서원은 서원의 배치의 FM이다. 높은 곳에 핵심 공간인 중정당이 아래를 내려보고, 양측에 기숙사를 두고, 뒷쪽에 사당을 두고 사원 입구에는 누각을 배치했다. 보편적인 배치이다. 그러나 도동서원을 더욱 아름답게 해 주는 건 도동서원에 숨어 있는 여러 디테일이다.

 

 

주인을 부르는 문, 환주문. 작고 아담하다. 머리를 숙이고 들어온나 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문은 참 매력적이다. 문 자체로도 충분히 좋지만, 서원의 그윽한 분위기를 더욱 살려주기도 한다.

 

 

환주문을 지나 만나게 되는 가장 핵심 건물인 최고급 교실, 중정당이다. 건물 자체로도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다. 기둥에 하얀 띠를 둘러 멀리에서도 문묘 배향 서원임을 알려준다. 높은 기단위에 자리 잡아 웅장해 보인다.

 

 

중정당이 돋보이는 건 바로 이 석축때문이다. 돌 쌓은 거 좀 보소..... 이게 기술이냐고..... 이거는 정성이다. 몬드리안의 그림은 이거 보고 배낀 거 아이가?? 그것도 모자라 용 대가리를 장식으로 붙여 놓았다. 대단한 냥반들이다. 한낱 서원을 이렇게 까지 정성을 들여 짓는 이유가 뭘까 궁금하다. (참고로 저 용머리 장식을 떼어 가는 넘들이 있어서 4개 중에 하나만 진짜고 3개는 모조품을 붙여 놓았다고 한다.)

 

 

도동서원 현판. 조선 중기의 학자인 배대유가 썼다고 한다. 추후에 서원의 현판에 대해서도 한번 글을 올리겠다. 누가누가 잘 썼나? 서원의 현판..... ㅋㅋㅋ

 

 

중정당 앞의 거북님이시다. 졸라 화난 표정이다. 도동서원 디테일의 백미다.

 

 

중정당에서 내려 본 경치. 우리 조상들은 학교도 이런 곳에 짓는다. 어디까지 가봤니 씨리즈 7 - 그대와의 문화유산답사기의 병산서원 편에서도 썼지만, 이런 경치에서 무슨 공부가 제대로 되겠냐고...... 내가 볼 땐 이거는 조상들의 미스다. 이런 경치에서는 공부 안 된다. 언니들 불러서 삼겹살 꾸워 먹기 딱 좋은 그런 경치다.

 

 

그런 경치를 딸과 함께 바라보다......

 

 

한훤당 김굉필 선생은 그렇게 허무하게 가십니다. 그러나 2년 후에 연산군의 폭압에 견디다 못한 대신들이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중종반정입니다. 이 쿠데타 성공합니다. 중종은 신진 사림세력들을 중용하는데, 이 선두에는 조광조가 있습니다. 우리 스승을!!! 김굉필 선생은 바로 사면되고 도승지, 영의정 등에 오르시고 이거 죽고 나서 오르면 머해?? 광해군 2년에 와서는 동방오현으로 문묘에 배향되는 영예가 주어집니다. 도동서원은 이 김굉필 선생을 모신 사당입니다.

 

 

 

 

 

 

도동서원에서 꼭 봐야 될 것 중에 하나가 이 담장이다. 자연 막돌로 쌓은 위에, 암키와를 줄 바르게 5단으로 놓고 또 그 사이는 진흙으로 채우고, 그것도 모자라 1미터 간격으로 수막새를 끼워 넣었다. 이런..... 물론 이런 디테일도 뛰어나지만, 담장이 지형에 따라 꺾이고, 높낮이의 변화에 따라 담장이 만들어 내는 이 라인의 아름다움은 우리 건축에서만 볼 수 있다. 하도 아름다와서 최초로 토담이 보물로 지정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담장 장식의 수막새

 

 

도동서원은 서원건축이 가져야 할 건축적 규범을 가장 완벽하게 갖춘,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런 평가가 아니라 할지라도, 낙동강을 내려다 보는 위치와 배치, 중정당과 석축의 아름다움, 담장이 만들어 내는 스카이라인, 곳곳에 숨겨져 있는 이 건물을 지은 이의 정성, 그리고 입구의 저 은행나무까지.... 서원건축의 백미라고 불리는 병산서원에 버금갈 만큼 아름다운 서원입니다. 아직 못 가보셨다면 꼭 한번 들러보시길......

 

 

 

2. 울나라 최초의 서원, 최초의 사액서원 - 소수서원 (경상북도 영주)

 

 

소수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소나무. 이게 서원 지을 때 그 소나무라면 거의 500살 먹었다는 얘긴데..... 그야말로 소나무 할배들이다.

 

 

서원의 주요 기능은 사립대학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시절에 누가 왜 이런 걸 세웠을까요? 훈구파와 사림파라는 게 있습니다. 이거 고등학교 시절에 좀 배운 것도 같은데..... 여하간, 훈구파는 주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기득권 세력이고, 사림파는 과거 시험으로 등용된 개혁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둘이 한판 제대로 붙습니다. 사림파 코피 터집니다. 에잇.... 이대로 물러 날 줄 알고??? 또 힘을 키웁니다. 한판 더 붙자!! 이번엔 갈비뼈가 나갑니다. 이런 시련을 네번의 사화를 걸쳐 맞이하지만, 결국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그러나 이 네번의 사화로 사림파에서 흘린 피도 상당한지라, 자기 세력을 결집할 만한 그런 근거지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서원입니다. 중종 38년 (1543) 풍기군수로 있던 주세붕이 처음 서원이라는 것을 세웁니다. 고려말의 학자 안향이란 분에게 제사도 지내고, 주자학도 좀 더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조선시대 제일 중요한 학문이 주자학이고, 이 주자라는 중국 냥반이 복건성에사 무이정사 라는 걸 만들었는데, 경치가 너무 좋았다고 그러네요. 우리도 그걸 본받습니다. 조용하고 한적하고 경치 좋은 곳에 정사를 짓고 제자를 가르치는 선비들이 자꾸 늘어납니다. 그렇습니다. 서원의 정확한 정의는 명망이 있고 충절이 있는 선비를 모시고 그 덕의와 절의를 공부하는 곳입니다.

 

 

강학공간의 핵심 건물인 강학당(명륜당)이 있고, 그 뒤에 교무실인 직방재, 일신재가 있다. 우측에 기숙사인 학구재와 지락재가 있고, 오른쪽엔 도서관인 장서각이 있다. 문성공묘와 전사청, 영정각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다. 강학당과 문성공묘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건축물이다.

 

 

퇴계 이황선생이 풍기군수로 옵니다. 명종에게 건의합니다. "나라에서 사원 쫌 지원해 주쇼잉" 명종, 소수서원이라는 편액과 수많은 책들과 노비를 내려줍니다. 그래서 소수서원은 최초로 임금이 현판을 내려준 사액서원이 됩니다. 초기에는 입학 정원이 10명 정도였는데, 사액을 받은 후 30명 정도로 늘어납니다. 공부 안하고, 특히 언니들 만나고 이러면, 바로 퇴학이었댑니다.

 

 

소수서원 진입로에 있는 보물 56호 숙수사지 당간지주. 엉? 여기가 절터였다고? 통일신라시대의 이 숙수사는 부석사 못지 않게 큰 절이었다고.... 단종 복위 거사가 발각되면서 순흥이 쑥대밭이 될 때 이 숙수사도 불태워졌다고 한다. 풍기군수 주세붕이 이 절터를 지나다가 이 풍광에 매료되어 오호 여기얏!! 하면서 서원터로 찌뽕 했다고.....

 

 

담장밖에 있는 경렴정. 풍광이 아름다운 곳엔 항상 이런 정자가 있다. 학문을 논하고 단합대회도 하는 곳인데..... 공부하다가 가끔 머리도 식힐 겸, 언니들 불러다 쏘주 한잔 하는 곳 되겠다.

 

 

 

 

 

 

보물 건축물 강학당(명륜당)이다. 유생들이 스승에게서 강의를 듣던, 조선 최초의 사립대학교 교실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처럼 배흘림 기둥에다, 사방에 툇마루를 두른 독특한 구조로 되어있다. 바랜 단청들이 편안하다.

 

 

소수서원은 서원건축이지만 보물창고입니다. 안향의 초상화가 국보로 지정되어 있구요, 보물도 5점이나 있습니다. 아까 본 당간지주와 대성지성문성왕전좌도 라는 이름도 희한한 공자 그림과, 주세붕의 초상, 그리고 건물로써, 강학당과 문성공묘가 보물입니다.

 

 

교무실인 일신재. 건물 이름을 짓는 것도 세심하게 지었다. 서원 대문을 거쳐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있는 기숙사는 독서를 통해 즐거움을 얻는 지락재,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갈고 닦는 학구재, 그리고 교무실은 날마다 새롭게 하는 일신재와 깨어 있는 마음을 곧게 하는 직방재를 거쳐 세상의 이치를 밝힌다는 명륜당에 도달한다. 여기서 배출한 인재가 4000명을 넘었다고....

 

 

기숙사인 학구재. 아주 예전에 이 앞에서 찍은 아이들의 사진이 남아있을 것 같아 찾아 보니... 있다.

 

 

 

 

2007년에 찍은 사진이라고 되어 있다. 산이 다섯살, 들이 네살이다. 우리 아이들이 저런 시절도 있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 우리 아이들, 지금도 예쁘고 저 시절에도 예뻤다.

 

 

그리고 제향공간의 핵심인 안향 선생의 위패를 모신, 또하나의 보물 건축물 문성공묘다. 보편적인 서원의 배치는 강당이 앞에, 사당이 뒤인 전학후묘이나, 소수서원은 동학서묘이다.

 

 

그리고 소수서원에서 만나 볼 수 있는 국보, 안향의 초상화. 잘 생기셨수~~

 

 

서원은 중앙 정부의 교육기관인 성균관, 그리고 지방 정부의 교육기관인 향교와 함께, 사설 교육기관으로써 선현들을 모시고 후학들을 가르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지방 선비들이 중앙 권력에 발탁되어 권력 파벌을 형성하면서 자기 세력을 키우기 위해 서원을 지나치게 늘려 영조 때는 700개에 이르게 되어 그 폐해가 커지자, 대원군은 씨발 다 없애!!! 이렇게 되어 47개를 제외한 모든 서원들이 없어집니다.

 

 

소수서원은 최초의 서원이니 만큼 건물들이 놓인 위치가 훨씬 자유롭습니다. 강당에 견주어 사당은 왼쪽 뒷켠에 치우쳐져 있고, 기숙사의 배치도 지맘대로 입니다. 도산서원이 보여주는 엄격한 계층성도, 병산서원의 단아한 짜임새도 없습니다. 이는 어떤 규칙이 정해지기 전에 형편과 필요에 따라 주위 환경과 어우러면서 건물을 앉혀 나갔기 때문일 것입니다.

 

 

 

3. 영남 유학의 총본산 - 도산서원 (경상북도 안동)

 

 

도산서원은 생각보다 건물도 많고 오밀조밀하다. 그래서 눈에 확 들어오지도 않는다. 가기 전에 한번 공부하고 가면 훨씬 낫다. 이용재 선생의 말을 빌리자면 400년 된 테라스식 하우스다.

 

 

도산서원은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눈다. 도산서당, 농운정사를 중심으로 한, 서원 전체 영역의 앞부분은 이황이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을 한 도산서당 영역이고, 뒷부분은 이황 사후에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도산서원 영역이다. 전체적으로 도산서원의 중심은 서원의 메인 교실인 전교당이며, 전교당 뒷쪽에 사당인 상덕사가 있는 전학후묘의 배치이다.

 

 

한국에서보다 외국에서 더 높이 평가받는 철학자인 퇴계 이황 선생을(1501 ~ 1570) 모신 서원입니다. 퇴계 선생은 8남매의 막내입니다. 어렸을 때, 하루는 형인 이해가 놀다가 손을 다쳐 피가 나자 퇴계가 형의 손을 잡고 울었댑니다. 엄마가 "다친 사람은 형인데, 니가 와 우노?" 하고 묻자 "형은 저보다 나이가 많아서 울지는 아니하나, 피가 이렇게 흐르는데 어찌 아프지 아니하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공부만 잘한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출중했다는 얘기입니다.

 

 

23살에 성균관에 입학해서 34세에 과거에 급제합니다. 벼슬이 대사성까지 오르지만 43세에 은퇴합니다. 음 역시.... 그러나 나라에서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단양군수 해" "안해여" "쓰벌, 어명이닷" "넹.ㅠ.ㅠ" 9개월만에 사직. "이번엔 풍기군수!" "어명이여?" "당근" 백운동 서원에 가니 다 찌그러져 가고..... 임금한테 청탁도 좀 넣으시고.... 명종, 퇴계의 말이라면 껌뻑합니다. 그래서 소수서원으로 다시 탄생합니다. 그리곤 1년만에 사직, 그리고 1560년, 완전 낙향..... 도산서당을 차립니다.

 

 

 

 

 

 

 

 

도산서당은 삽시간에 소문이 납니다. 전국 최고의 사립대학이 생겼다고??? 쫌 한다는 유생들, 구름처럼 몰려 듭니다. 부랴부랴 농운정사를 짓습니다. 그렇게 후학을 키우다 1570년에 가십니다. 유언은 "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하고, 비석도 세우지 말 것"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유언 같은데...  퇴계의 부음을 들은 이율곡은 울면서 제문을 올립니다. "선생은 세상의 유종(儒宗)이 되셨다. 정암 조광조 이후에 견줄 만한 사람이 없다. 재조(才調)와 기국(器局)은 혹 정암에 미치지 못한다 해도 의리를 탐구하고 정미(精微)함을 다한데 이르러서는 정암 또한 미칠 수 없는 정도였다" - 이용재의 인문학적 집짓기 블로그에서

 

 

천원짜리 지폐에는 퇴계 선생의 영정과 도산서원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에게는 꽤 익숙합니다. 예전에 그 도산서원 그림에 마당 쓰는 할배가 있다고 해서 막 찾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같은 각도에서 찍은 사진을 보니 똑 같군요. 사진 정면에 보이는 것이 퇴계 선생이 손수 지어 후학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입니다. 이 도산서당 뒷쪽으로 해서 퇴계를 기리는 도산서원이 들어섰으니, 도산서원의 모체가 바로 이 도산서당입니다.

 

 

이것은 신권에 있는 겸재의 계상정거도이다. 계상에 그냥 조용히 산다 라는 뜻의 그림이다. 도산서당을 짓기 전에 먼저 계상서당이란 걸 지었더랬다. 거기서 율곡 선생을 처음 만났다. 후에 겸재가 도산서당을 모델로 해서 이 그림을 그렸다. 퇴계 할배가 저 서당에서 곧 나오실 것 같다.

 

 

퇴계 이황은 대학자이지만,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일화가 참 많습니다. 몇가지만 소개할까 합니다.

 

 

평소에 몸이 약한 이황이 장가를 가 첫날밤을 보내게 되었다. 당시에는 혼인 후 한동안 여자쪽 친정집에서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이에 따라 이황도 첫날밤을 처갓댁에서 치렀는데, 이황의 장모는 병약한 사위가 제대로 일을 치렀을까 걱정이 되어 다음날 딸한테 어떻게 되었냐고 물어보았다. 이 때 딸의 대답 "말도 마이소, 짐승이데예......"

 

 

이황이 첫번째 부인과 사별 후 마침 예안에 귀양가 있던 권질이 그를 부른다. 권질에게는 집안의 참극으로 정신줄을 약간 놓아버린 여식이 있었는데, 이황에게 맡아줄 것을 부탁하자, 이황은 그 정신나간 권질의 여식을 아내로 받아들인다. 이황의 성격이 무던해서 그럭저럭 지낸다. 하지만 권씨는 이황을 난처하게 만들만한 일을 많이 벌렸는데, 하루는 제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제사상에 있는 배를 집어다가 몰래 치마속에 숨겼고, 이황의 형수가 이 일로 질책하자 "조상님도 그리 언짢게 생각치 않을 겁니다" 라고 아내를 감쌌다. 나중에 아내에게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 권씨부인은 배가 몹시 먹고 싶어서 그랬다고 하자, 이황은 배를 가져다가 손수 아내에게 깎아 주었다고 한다.

 

 

자기 아내를 소중히 대한 것처럼, 이황은 부부관계에도 많은 조언을 했다. 부부사이에 불화로 갈등을 겪는 제자에게 이황은 집 밖에서 있었던 온갖 울분과 괴로움을 집안으로 들이지 말고 사립문에서 마음을 정화한 뒤에 집안으로 들어서라고 조언했으며, "부부는 남녀가 처음 만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어서 가장 친밀한 관계를 이룬다. 한편 바르게 해야 하고 가장 조심해야 한는 관계다. 그래서 군자의 도는 부부에게서 시작된다." 라는 말도 남겼다.

 

 

기대성과의 사단칠정 논쟁도 매우 유명한데, 이때 이황은 58세 대사성, 기대승은 갓 과게에 급제한 32세의 신출내기였다. 대사성은 바로 성균관의 우두머리로, 지금으로 치면 서울대학교 총장이자 임금인 선조의 스승이었다. 이런 분과 이제 갓 부서배치를 받은 7급, 혹은 5급 공무원과 인터넷으로 학문 배틀을 벌렸다는 이야기인데, 기대승이 임금도 어려워하는 대학자에게 기냥 들이댄 셈.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철학적 논쟁을 이어나갔다. 오늘날의 학계에서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단양군수로 재직하던 시절 관기였던 두향과의 로맨스 또한 알려져 있다. 당시 이황의 나이는 48세, 두향의 나이는 18세. 두 사람은 9개월 남짓 사귀다가 이황기 풍기군수로 발령이 나면서 헤어졌다. 이황이 떠난 뒤 두향은 남한강 근처에서 살다가 사망했으며, 그녀의 묘는 현대에도 이황의 후손들이 관리해 주고 있다고 한다. 이황과 두향이 서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도 기록이 조금씩 다른데, 학자의 이미지에 맞게 플라토닉 러브에 가까웠다는 이야기부터 위의 "밤퇴계' 에피소드처럼 매우 열정적인 애정 관계였다는 이야기까지 다양하다. 여하간, 이황은 로맨티스트였다.

 

 

도산서원의 모체인 도산서당. 가장 먼저 생긴 건물이다.

 

 

서고인 광면실, 습기가 차면 안되니 바닥에서 띄워 놓았다.

 

 

도산서원의 가장 핵심공간이 전교당이다. 보물건축이다. 건물자체은 의외로 소박하다.

 

 

선조가 당대의 명필 한석봉을 부른다. 불러 주는 대로 왼쪽부터 써!! 원... 서.... 산.... 엥?? 천하의 한석봉도 도산서원에 내려 줄 편액이라고 하면 부담스러워 할까봐 이렇게 거꾸로 불러줬다고 한다.

 

 

퇴계 선생이 가시고 난 뒤에도, 유생들은 계속 몰려듭니다. 애초에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만으로는 감당이 안됩니다. 수제자 서애 류성룡 선생은 마스터 플랜 TF를 꾸립니다. "도산서당과 농운정사 사이로 긴 골목을 만들고, 대지를 층층이 조성해 도산서원을 완성한다. 젤 끝에는 사당을 놓고" 그래서 층으로 된 테라스 하우스가 완성됩니다.

 

 

1층 : 도산서당, 농운정사

2층 : 동서 광명실, 책을 보관하는 1층이 필로티로 처리된 도서실

3층 : 전교당

4층 : 존덕사

 

 

마치 섬처럼 보이는 저 곳은, 도산서원 입구에서 강 건너로 보이는 시험을 치렀다는 뜻의 시사단이다. 정조가 퇴계의 덕을 기리고, 멀리 한양에 올라와서 시험을 보는 수고를 덜기 위해 여기서 시험을 보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퇴계 선생의 명성을 봐서 일종의 편의를 제공한 셈인데, 이 때 시험을 보기 위해서 약 7000명이 모였다고 한다. 안동댐이 생기면서 시험을 봤다던 그 솔숲은 모두 물에 잠기고, 지금은 다시 축대를 쌓고 비각을 모셨다.

 

 

 

4. 조선 명필들의 전시장 - 옥산서원 (경상북도 경주)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 선생이 눈을 감은 지 20년 후인 1573년에 세워졌다. 1574년에 사액서원이 되었고. 살아서는 모른다, 어떻게 될지..... 그래서 살아 있을 때 최선을 다해서 살아햐 하는 걸까.... 죽은 뒤의 나의 평가가 어떻게 될지 살아 있는 지금은 알 수가 없으니.....

 

 

옥산서원도 전형적인 서원배치를 따랐다. 처음 나오는 역락문, 그리고 누각이 무변루와 강당인 구인당이 그 축이다. 구인당 뒷쪽은 제사를 모시는 체인묘가 있다. 서향이라는 게 좀 특이한데, 무학산과, 서원 앞으로 흐르는 계곡을 마주보게 하기 위해서 인듯 하다.

 

 

처음 만나는 외삼문인 역락문.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의 그 역락이다.

 

 

역락문을 통과하면 만나게 되는 누각 무변루. 보통 절이나 사원의 누각은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출입구 역할을 한다. 그래서 1층은 필로티로 트여 있고, 1층은 전망을 바라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석이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병산서원의 만대루와 부석사의 악양루이다. 하지만 옥산서원의 무변루는 모두 문을 달아 놓았다.

 

 

역시나 출입문은 작다. 도동서원의 환주문도 그렇고.... 왜 이리 작게 만들었는지..... 항상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된다. 절을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다.

 

 

무변루의 작은 문을 통과하면 만나게 되는 옥산서원 강당인 구인당과 좌우의 서재와 동재가 강학공간을 이룬다.

 

 

서원의 모델은 우리 막내이..... 하도 절, 서원, 옛집 이런 곳만 델구 다녀서, 실은 어딜 가자고 하면 절대 안갈라고 그런다. 그래도 자라서 이런 맛을 알게 되면, 아빠한테 고마워 할 날이 올거라 믿는다. 아빠가 울 엄마한테 그랬던 것처럼.....

 

 

재 이언적 선생(1491 ~ 1553)은 조선시대 가장 뛰어난 성리학자 중의 한분입니다. 하긴 얼마나 공부를 잘 했으면 역사적으로 제일 공부 잘 했던 5명 안에 꼽히겠냐고요.... 퇴계 이황의 정신적 스승이기도 합니다. 근데 이 냥반은 성리학 공부만 잘 했던게 아닌가 봅니다. 생전에 건물을 2개 지었는데요, 처음에 혼자 공부할라꼬 경치 좋은 데다 지었던 독락당과 아픈 엄니를 모실려고 지었던 향단이 그 건물들인데 지금은 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대단한 냥반입니다. [어디까지 가봤니? 울나라 건축물 8 - 옛살림집, 향단 편 참조]

 

 

옥산서원의 현판. 참 못 썼다. 근데 이거... 추사 김정희가 쓴 글씨랜다. 허걱.... 갑자기 판전이 생각난다. 죽기 3일전에 썼다는 그 봉은사 판전.... 그것도 엄청 못 쓴 글씬데..... 내가 보기에는ㅋㅋ. 유홍준 선생은 추사체를 보고 "솜으로 감싼 쇳덩이, 송곳으로 철판을 꿰뚫는 힘으로 쓴 글씨" 라고 했는데..... 안쪽에 옥산서원이라는 현판이 하나 더 있는데 그건 선조 때 명필 이산해가 썼다. 옥산서원은 현판 구경만 해도 충분히 볼 만한 가치가 있다.

 

 

교실인 구인당의 내부 단청과 현판. 이곳에서 공부해서 정승이 된 사람이 숱하게 많다는데.... 구인당의 구인은 성현의 학문이 다만 '인(仁)'을 '구(求)'하는 데 있다는 회재 성리학의 핵심을 나타내는 말로, 회재의 저서 『구인록(求仁錄)』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저 현판은 엄마랑 떡썰기 시합을 한 한석봉의 작품이다.

 

 

구인당에서 바라 본 무변루. 외삼문에서 바라 본 무변루는 꽉 막혀 있었는데, 오히려 마당쪽에서는 이렇게 트여 있다. 저 계단으로 올라가려면 곡예를 좀 해야 할 것 같다. 병산서원 만대루도 그렇더만.... 옛 건물들은 사용하는 사람의 편리.... 머 이런 거 하고는 거리가 쫌 멀다.

 

 

무변루. 그대 사랑 변치 마오?? 무변루? 아니다. 변자가 다르다. 풍월무변에서 따왔다고 한다. 맑은 바람과 밝은 달, 아름다운 풍경이 끝이 없다.... 저 현판 역시 석봉 한호가 썼다.

 

 

툇마루를 돌로 공가 놨다.

 

 

이건 정료대라고, 밤에 제사 지낼 때 불 밝히던 가로등 되겠다.

 

 

도서관인 경각이다. 5대 서원의 조건으로 검색해 보니 잘 안나온다. 그러니까 후대에 말 갖다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든 거 아닐까? 하긴 요즘도 대한민국 5대 사립대학교 라고 하면, 이 삼십년 전과 많이 다를테니까..... 추측해 보건데, 그 시대에 아주 이름난 서원 5개 일거다. 이름이 나려면?? 물론 과거에도 많이 급제를 해야되고, 그리고 사당에 누구를 모셨는냐도 중요할 거다. 5대서원에 배향된 사람 면면을 보면 만만찮다. 김굉필, 안향, 이황, 이언적, 류성룡.... 그리고 이 도서관에 얼마나 많은, 중요한 책들이 있는가도 꽤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이다. 제향공간엔 아무나 못들어간다. 그래서 담도 아주 정성들여 쌓았다. 기와를 쌓고 흙을 바르고 또 쌓고 바르고..... 그 정성이 대단하다.

 

 

여기서 잠깐 5대 서원의 현판을 한번 볼까요? 누가누가 잘 썼나??? 그림을 쭉 올릴테니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누가 잘 썼는지, 나름 1등을 한번 매겨 보세요.....

 

 

도동서원 현판. 조선 중기의 글 잘 쓴다는 배대유라는 선비가 썼다

 

 

소수서원. 명종이 직접 썼다.

 

 

도산서원. 떡집 아들래미 한석봉이 임금이 보는 앞에서 졸라 쫄면서 썼다.

 

 

옥산서원. 추사가 제주도 유배 가기 전에 썼다. 저런 옥자 정도는 나도 쓰겠다....ㅎㅎ 

 

 

병산서원. 한석봉의 글씨체와 닮았다고 하는데.... 누가 썼는지는 못 찾았다. 아.... 찾았다. 인터넷에 안되는게 어딨어?!! 음... 역시 대단한 우리나라.... 예안 이씨 곡강정 이호 라는 분이 썼다고 한다.

 

 

저는 판단 못합니다. 추사의 봉은사 판전을 보고 못 쓴 글씨라고 보여지는 저의 눈으로, 어찌 이런 글씨를 잘 썼다, 못 썼다 라고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서로 다른 점을 감상할 뿐이지요.....

 

 

 

5. 건축물과 자연의 조화가 이루는 걸작 - 병산서원 (경상북도 안동)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은 그 구조가 복잡하여 명쾌하지 못하고, 이언적의 옥산서원은 계류에 앉은 자리는 빼어나나 서원의 터가 좁아 공간운영에 활기가 없고, 조식의 덕천서원은 지리산 덕천강의 깊고 호쾌한 기상이 서렸지만 건물 배치간격이 넓어 허전한 데가 있으며, 김굉필의 도동서원은 공간배치와 스케일은 탁월하나 누마루의 건축적 운용이 병산서원에 미치지 못한다. 이에 비하여 병산서원은 주위의 경관과 건물이 만대루를 통하여 흔연히 하나가 되는 조화와 통일이 구현된 것이니, 이 모든 점을 감안하여 병산서원이 한국 서원 건축의 최고봉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권 중에서

 

 

병산서원에 만대루가 없다면, 그건 병산서원일까? 만대루가 이 위치가 아닌 다른 위치에 있었더라면 그건 병산서원일까? 만대루에 올라 앉아 건축과 자연과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 이 건축물이 여기에 있기 때문에 병산서원이 바로 그 병산서원이 되었다. 헉.... 그대가 내 이름을 불러줘서 나는 비로소 꽃이 되었다...... 이런 느낌??? ㅎㅎㅎ

 

 

서원 정문인 복례문으로 들어가면 왼쪽에 연못이 있고, 맞은 편 한 단 높은 곳에 옆으로 기다란 만대루가 있다. 누 밑은 휘어진 자연상태 그대로의 꾸불꾸불한 기둥이 받치고 있고, 2층 누마루에는 반듯한 기둥들이 사방을 둘러 쌌는데, 벽은 두르지 않고 트여 있다. 마당에 들어서면,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있고, 맞은 편으로는 입교당이 있다.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뜻에 걸맞게 서원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입교당 뒷쪽으로 돌아가면,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오고, 가장 높은 위치에 사당인 존덕사가 있다. 이 배치는 서원 건축의 표본이 된다.

 

 

서애 류성룡 (1542 ~ 1607) 학문은 높고, 청렴결백한 삶을 사셨습니다. 임진왜란에는 이순신과 권율이 마음껏 싸울 수 있게 밀어줬습니다. 사실, 이분의 학문이 얼마나 높은지, 얼마나 청렴하게 사시다 가셨는지, 임난땐 얼마나 큰 활약을 했는지는 잘 모를 뿐더러 실감도 안납니다. 책에서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줄 압니다. 하지만, 이 양반이 훌륭한 건축가인 것은 너무 잘 실감합니다. 그가 남긴 작품이 바로 눈앞에 있으니까요......

 

 

퇴계 이황의 수재자. 동인의 영수. 퇴계 선생의 제자는 다 동인입니다. 율곡 선생의 제자는 서인이구요. 서인의 영수는 뒤에서 살펴볼 돈암서원의 주인공 사계 김장생입니다. 풍악서당이라고, 읍내에 서당이 하나 있었는데, 주위가 시끄러워져 공부에 집중하기가 어렵습니다. 류성룡 선생이 여기로 옮깁니다.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맞은 편에는 병풍같은 산, 병산이 있는지라 이름을 병산서원으로 짓습니다.

 

 

퇴계 선생 왈 "서원은 성균관이나 향교와 달리 산천 경계가 수려하고 한적한 곳에 있어 환경의 유독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만큼 교육성과가 크다. 그래서 모든 서원은 경치가 좋거나 한적한 곳에 자리하였는데, 병산서원만큼 그 말에 합당한 서원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입교당에서 내려다 본 만대루와 동재, 서재.

 

 

내삼문 앞 배롱나무 아래서 바라본 입교당과 동재

 

 

한국 전통건축의 특징을 말할 때 항상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주변 자연 환경과의 조화입니다. 사실 전통건축 뿐만 아니라 현대건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그 조화라는 것이 이미 있던 자연을 잘 읽어내고, 거기에 합당한 건축물을 만드어서 자연에 잘 앉히는 것을 말합니다. 병산서원은 각 건물을 따로 떼어내서 보면 그냥 일반적인 옛 건물입니다. 그러나 그 건물들이 주위 환경과 어울려서 어떤 효과를 내는지를 잘 보여주는 아주 훌륭한 예시입니다.

 

 

병산서원, 특히 만대루에 대해서는 앞의 글 [어디까지 가봤니? 울나라 건축물 7 - 당신과의 문화유산답사기의 병산서원 편]에서 한번 다루었습니다. 거기에도 썼지마는, 이런 절경속에서 유생들은 얼마나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유생들이 머 중년은 아닐테고.... 혈기 왕성할 십대 후반 이십대 초중반의 나이라고 하면, 이런 아름다운 경치가 그들의 감수성을 얼마나 자극했을텐데....

 

 

유물과 책,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 입교당 후면 왼편으로 비켜서 있다. 습기를 피하기 위해 판문을 달았다.

 

 

서애 선생의 위폐가 있는 존덕사. 병산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다. 서애 선생은 병산서원 외에도 호계서원에도 배향되었다.

 

 

서원을 관리하고, 창고 및 식사 준비도 하고, 제사기간에는 숙소 역할도 하는 고직사.

 

 

병산서원의 또 다른 명물, 달팽이 뒷간. 문 없이도 일 보는 사람을 가리게 설계했다. 조상들의 위트가 엿보인다.

 

 

 

 

병산서원 앞의 전경들. 병산서원이 없다 하더라도 이 절경은 충분히 볼 만한 값어치가 있다. 그러나 이 절경들은 병산서원이 있어서 더욱 빛난다. 병산서원도 물론 이 절경이 있어서 더욱 가치있게 되고.....

 

 

유홍준 선생은 이 병산서원을 가리켜 서원건축의 백미라고 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한국 건축의 백미라고 해고 결코 지남침이 없을 겁니다. 건축과 자연이 조화되어 서로를 더 빛나게 해주는, 모름지기 건축이란 이래야 된다고, 병산서원은 그렇게 말 하는 것 같습니다.

 

 

 

6. 우함양의 대표서원 - 남계서원 (경상남도 함양)

 

 

일두 정여창 선생(1450 ~ 1504)이 태어나 살던 개평마을이 보이는, 함양 수동면 원평리에 정여창 선생을 배향한 남계서원灆溪書院이 자리잡고 있다. 소수서원 다음으로 오래된 서원으로, 사액 또한 소수서원에 이어 두번째로 받았다. 사림의 본바닥으로 자리잡은 영남지방의 많은 서원 가운데서도 '좌안동, 우함양'에 나오는 그 우함양의 기틀을 잡은 정여창을 모신 서원이어서, 그 명성이 높다.

 

 

경남 밀양에 가면 김지대라는 선비를 모신 남계南서원이 있다. 헷갈리지 말자ㅋㅋ. 정여창의 남계서원은 서원 옆으로 지나가는 개울의 이름이 남계灆溪였다고..... 

 

 

역시 서원의 정석 배치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 연당이 두개인 점과 풍영루를 지나서 나오는 마당이 꽤 넓은 점, 그리고 강당 뒤 가파른 계단을 올라 경사지 높은 곳에 사당을 배치하여, 사당의 엄숙성을 강조한 점 등이 이색적이다.

 

 

남계서원의 입구에 해당하는 풍영루

 

 

풍영루 2층 누각에 올라서면 남계서원이 한눈에 조망된다. 경사지를 이용하여 건물들이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고, 전체적으로 호방함과 당당함이 느껴진다.

 

 

풍영루를 통과하면 강당영역이 나온다. 정면에 강당이 자리잡고 동재와 서재가 좌우에 위치하고, 그 앞에는 묘정비각이 있다.

 

 

동재인 양성재와 서재인 보인재. 동재와 서재는 각각 2칸 규모의 건물인데, 각 1칸은 온돌이고 나머지 각 1칸은 애련헌, 영매헌이라고 이름 붙인 누마루로 되어 있다. 대지의 경사를 이용하여 누문보다 한 단 높게 조성한 것으로, 지면이 낮은 쪽에는 누마루를 조성하여 조망이 좋도록 하여 공간이 외부 자연으로 연장되게 하였다.

 

 

강학공간을 구성하는 중심건물인 명성당. 강당 이름 '명성(明誠)'은 『중용(中庸)』의 "밝으면 성실하다[明則誠]"에서 취했다. 역시..... 그래서 애들은 밝게 키워야 된다.

 

 

 

그렇게 키워서 무지 밝은 아이들.....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 계단이 상당히 가파르다.

 

 

사당이다. 강당과 멀리 떨어진 경사지에 위치했다. 일두 정여창 선생을 중심에 모시고, 좌우로 정온 선생과 강익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남계서원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

 

 

안동에 퇴계 이황이 있다면 함양에는 일두 정여창이 있다고 할 만큼, 퇴계 선생과 맞장을 뜰 정도로 함양의 자랑거리입니다. [어디까지 가봤니? 울나라 건축물 8 - 옛 살림집 일두 고택 편 참조] 1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김굉필과 함께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가 되어 지리산으로 들어가 졸라 성리학을 공부합니다. 젊었을 때 부터 탁월했다고 합니다. 학문이 뛰어나 여러차례 벼슬을 주었으나 거절하고 공부만 주구장창하다가 1490년에서야 벼슬길에 오릅니다. 한때는 어린 연산군의 스승을 하기도 했습니다.

 

 

연산군은 성장과정이 참 딱합니다. 아부지 성종이 여자라면 그냥 헤벌레~~ 하는 스타일이라 후궁이 졸라 많습니다. 엄마인 폐비 윤씨는 중전이 죽고 나서 우째우째 성종의 마누라가 되었는데, 본래 질투심이 많은 여자인데다, 성종이 좀 바람둥이어야 참지.... 그래서 시기질투가 어마어마해서 다른 후궁들의 모함과 음해... 머 이런 거에 걸려 28살에 사약을 받습니다. 이런 가정사에서 자란 연산군이 멀쩡할 리가 없습니다. 특기가 처녀 건드리기입니다. 아주 개쓰벌 망나니입니다. 그래서 가정환경이 중요합니다. 엄마 아부지가 행복하고 그런 가정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들은 먼가 달라도 다릅니다. 일단 아이들이 밝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베풀 줄도 압니다. 그리고 이런 아이들은 자존감이 높아 쫄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들 무지 밝습니다. 영어는 정말 못하지만.....ㅋㅋ 그렇게 밝게만 자라줘도 충분합니다...... 어험... 이야기가 좀 빗나갔습니다.

 

 

연산군은 그렇게 죽은 생모를 좀 바로 세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대쪽같은 사림파들이 안된다고 합니다. 이것들을!!! 머 껀수없나 하고 벼르고 있던 차에, 조의제문 사건이 터집니다. 정여창과 함께 김종직의 밑에서 수학한 동문 친구인 김일두라는 혈기 왕성한 친구가 스승인 김종직이 쓴 단종은 의로운 왕이다 라는 조의제문을 성종 실록에 씁니다. 훈구파의 거두 이극돈이 연산군에게 꼰지르죠..... 머라? 울할배가 나쁜 넘이라고!!! 사림 이넘들, 씨를 말려버려!! 대쪽같이 곧고 혈기 왕성하던 김일손은 바로 사형, 정여창은 졸라 유배, 김굉필도 졸라 유배.... 동방오현 중의 두사람이 이 무오사화로 유배를 떠납니다. 이 유배로 정여창은 결국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김굉필은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6년 뒤의 갑자사화 때 사형을 당합니다. 

 

 

 

 

남계서원 바로 옆에는 청계서원이 있다. 굴원의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 에 나오는 탁영이라는 호를 가진 김일손을 모신 서원이다. 글재주가 뛰어났고 무엇보다 불의를 보면 못참는 열혈남아였다. 5급 공무원 주제에 당시 훈구파의 거두 이극돈과 한판 붙는다. 결과는 능지처참..... 물이 흐린데 갓끈을 씻으려 했다. 그만큼 세상에 분노했고, 세상을 사랑했다.

 

 

함양의 남계서원은 건축의 꾸밈이 소박하고, 자연과 잘 어울립니다. 경사지에 세운 서원은 참 많지만, 바깥의 자연스러운 경사를 안으로 잘 끌고 왔습니다. 인위적으로 조작하지 않고 건물이 자연에 살포시 내려 앉은 자연스러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함양을 대표하는 서원입니다. 5대 서원이 모두 경북에 있어 좀 치우친 감이 없잖아 있는데, 함양에도 이렇게 멋진 서원이 있습니다. 일두고택과 남계서원이 있는 함양으로 소풍 한번 가시죠....

 

 

 

7. 조선 예학의 본당 - 돈암서원 (충청남도 논산)

 

 

돈암서원은 평지에 자리잡은 대표적인 서원중의 하나이다. 율곡 이이의 수제자이자, 예학의 대가인 사계 김장생(1548 ~ 1631)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창건되었다. 효종과 현종으로 부터 사액을 받았다. 두번 사액 받은 건 김굉필의 도동서원과 여기 딱 두군데.

 

 

중국에 있을 때, 공자의 집과 사당과 묘가 있는 취푸(곡부)라는 곳에 갔었습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고, 사당도 엄청 크게 지어놨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이제 더 이상 공자의 나라가 아닙니다. 마오가 집권을 잡고, 문혁의 시기를 거치면서 공자는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대학민국은 아직까지 공자의 나라입니다. 아직까지 공자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이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 문묘인데요, 성균관대학교 안에 있습니다. 이 문묘에는 공자를 포함한 오성五聖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과 공문십철이라 불리는 공자의 제자 10명, 그리고 송조 육현이라 불리는 송나라 때 선비 6명, 머 죄다 쭝국 사람들이네.... 그리고 우리나라의 유학의 거두 18분의 위패도 모셔져 있습니다. 문묘에 배향이 되면 이거 엄청 가문의 영광이라고 하는데요, 조선, 아니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 그 오랫동안 딱 18명이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하겠습니다. 이를 동국 18현이라고 합니다. 한번 볼까요?

 

 

1. 경주 설씨 설총

2. 경주 최씨 최치원

3. 순흥 안씨 안향

4. 연일 정씨 정몽주

5. 하동 정씨 정여창

6. 서흥 김씨 김굉필

7. 한양 조씨 조광조

8. 여주 이씨 이언적

9. 진성 이씨 이황

10. 울산 김씨 김인후

11. 창녕 성씨 성혼

12. 덕수 이씨 이이

13. 배천 조씨 조헌

14. 광산 김씨 김장생

15. 광산 김씨 김집

16. 은진 송씨 송준길

17. 은진 송씨 송시열

18. 반남 박씨 박세채

 

 

이런.... 우리 김해 김씨, 쪽수만 많으면 머해 ㅠ.ㅠ 오홋.... 쟁쟁한 분들이 계시군요.... 이 중에서 특히 뛰어난 다섯명을 뽑습니다. 그래서 동방오현이라 부릅니다.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 이렇게 다섯분입니다. 그런데 좀 자세히 살펴보면 해동공자 최충, 사림파 보스 김종직, 사육신 혹은 생육신 같은 선비들, 영남학파의 양대산맥인 퇴계와 남명의 그 남명 조식과 그 남명학파의 대가 정인홍, 서애 류성룡, 또 조선 최고의 정승이라는 황희나 체재공 같은 분들은 저기에 못 올랐네요. 그리고 유학자들만 뽑아서 그런지 조선 최고의 천재 정약용 선생이나, 최고의 명필 김정희 선생같은 분도 없습니다. 먼가 냄새가 좀 나긴 합니다만......

 

 

김장생은 1602년 낙향하여 양성당을 세우고 학문연구와 후학을 기르는데 힘썼다. 돈암서원은 이 양성당을 모체로 하여 건립되었는데, 김장생이 창건했던 강경의 죽림서원을 본땄다고 한다. 서원은 동쪽을 향해 앞으로 펼쳐진 일대의 들판을 내다보고 있다.

 

 

별다른 문이 없이 터진 입구로 들어가면, 좀 위압적인 누각을 만나는데, 산앙루이다. 최근에 중건되었다고 하는데.... 어쩐지 좀 안어울린다.

 

 

돈암서원 외삼문인 입덕문. 서원 정문이다. 안쪽에는 입덕문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외삼문에서 바라 본 서원의 중심공간이 양성당. 서재와 동재가 보이고 정면에 돈암서원원정비가 보인다. 양성당 뒷쪽에는 사당인 숭례사가 자리잡고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보물 건축물인 응도당이 있다. 서원과 향교 건축에서 강학공간이 사당과 직각 방향으로 놓인 것은 드문 일이라고 한다. 돈암서원은 1880년에 이 위치로 옮겨 왔는데 응도당은 1971년에 이 위치로 옮겨왔다. 아마도 늦게 와서 자리가 없어서???

 

 

응도당은 학문을 갈고 닦던 강당으로 서원 옛 터에 남아있던 것을 1971년 지금 있는 곳으로 옮겼다. 건물을 옮길 때 기와에 적힌 기록을 발견하면서 오래된 건물임을 알게되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사람 인(人)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지붕이다. 조선 중기 이후 서원 성격 중 강당으로는 보기 드물게 큰 규모를 갖추고 있으며, 옛 양식을 잘 따르고 있는 건물로 강당 건축 연구에 좋은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 문화재청

 

정회당. 김장생 선생 아부지가 만들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나는 이런 건물이 좋더라.... 아담한 집, 그리고 낮은 마루...

 

 

서재인 정의재. 경전의 의의를 자세하게 강론한다는 뜻.

 

 

동재인 거경재. 우르러고 받드는 마음으로 삼가고 조심하는 태도로 학문에 임하자.... 머 이런 뜻.

 

 

강당인 양성당. 바른 성품을 가르치는 집. 김장생이 낙향하여 처음 이 양성당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돈암서원의 모체가 되는 건물.

 

 

사당인 숭례사로 들어가는 내삼문. 꽃담이 아름답다.

 

 

사당인 숭례사. 김장생 뿐만 아니라 김집, 송시열, 송준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문묘에 배향된 동국 18현 중에서 네분을 모시고 있는 유일한 사당이다. 이거 쫌 대단하다고 한다.

 

 

"예禮의 가치는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데 있으며, 인간의 우열을 가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역할을 다하여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있다" - 김장생

 

 

김장생은 아들 김집과 함께 예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1명만 나와도 대대로 가문의 영광이라는 동국 18현에 부자가 다 뽑혔습니다. 대단한 집안입니다. 김장생은 이이와 성혼을 잇는 유학계의 대표적인 학자로 후학 양성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렸습니다. 제자로는 그의 학문의 정통성을 잇는 아들 김집을 비롯하여, 송준길, 송시열, 이유태, 강석기 등 후일 서인과 노론계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망라될 정도입니다. 김집은 예학 뿐만 효종과 함께 북벌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구운몽의 서포 김만중이 김집의 증손자입니다.

 

 

 

8. 호남 제일의 사액서원 - 필암서원 (전라남도 장성)

 

 

필암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모름지기 서원의 입구는 이래야 한다.... 고 보여준다. 이런 길.... 좋다... 편안하고, 아늑하고....

 

 

필암서원은 하서 김인후 선생을 모신 서원입니다.... 엉?? 하서 김인후?? 누구신지??? 여태껏 처음 들어보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좀 찾아보니..... 이 냥반 삶 자체가 아주 깔끔합니다. 학문도 높아 문묘에 배향된 18분 중에 한분입니다. 음.... 내가 공부가 부족한 건지..... 호남에서 동국 18현에 뽑힌 유일한 분이시라고 합니다. 성균관에서 퇴계 선생등과 같이 수학했고, 인종이 왕이 되기 전에 선생님이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인종이 왕이 되고 본인과 주위의 기대가 아주 대단했습니만, 인종은 왕이 되자마자 돌아가십니다. 이후에 하서 김인후는 모든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서 고사리만 먹고 살며, 인종의 기일이 되면 북망산을 바라보고 꺼이꺼이 울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만 전해 내려옵니다..... 머 대략 이런 스토리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전학후묘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하지만 확연루를 통해 들어가면 청절당의 뒷모습이 보인다. 청절당이 사당을 향해 배치한 점이 아주 이색적이다. 제사를 모실 때 마당을 좀 넓게 쓰기 위해서 이렇게 배치했다고 하는데.....

 

 

서원입구의 홍살문과 하마석. 하서 선생이 죽고 30년이 지난 1590년에 선생의 절개와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현종 3년인 1662년에 사액을 받았고, 1672년에 현재의 위치에 옮겨졌다.

 

 

서원의 정문인 확연루. 1층은 출입문이고, 2층은 유생들의 휴식공간으로 사용했다. 군자의 가르침은 확연하여 크게 공정하고, 하서 선생의 가슴은 맑고 깨끗하여 확연히 크게 공정하다.... 라고 우암 송시열이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이름 붙였다고 한다. 현판은 송시열의 글씨다.

 

 

누각 2층. 용무늬 단청이 눈에 띤다. 단청의 기능은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졸라 색칠을 해서 건물을 화려하게 보이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나무에 벌레가 먹지 않게 하고 썩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게 중국에서 들어와서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궁궐, 사찰, 서원건축 등 공적이고 권위를 높여야 하는 건축물에 주로 사용되었는데, 조선 초기에는 일반집에 까지 막 칠하자, 세종이 아예 단청금지!! 라고 금지령까지 내리기도 했다. 정승들의 대궐같은 살림집에는 일부 단청을 칠하기도 했다고 한다. 대전 쌍청당은 아직 단청이 남아있는 민간주택이다. 머 얘기가 좀 길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단청이 없는 건물이 훨씬 좋다. 옥산서원도 단청이 눈에 좀 거슬리기도 했고, 병산서원의 만대루 같은 건물은 단청이 없음으로 인해 훨씬 더 고상, 소박, 단아해 보인다.

 

 

확연루의 1층을 통해 들어가면 넓은 마당이 나오고... 그리고 엥??? 건물의 뒷모습이 나온다. 바로 메인 강당인 청결당이다. 이렇게 청결당은 정면을 보고 있지 않고, 윗쪽 사당을 향해 서 있다. 그리고 옆의 쪽문으로 다시 들어가면......

 

 

진짜 서원같은 요런 공간이 나온다. 동재와 서재가 보이고,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도 보인다. 내삼문 왼쪽에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이 경장각이다.

 

 

그리고 돌아보면 청절당의 정면이 보인다. 필암서원의 핵심공간이다.

 

 

필암서원의 현판은 병계 윤봉구라는 분의 글씨고 안에 있는 청절당은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글씨라고 한다. 옛날에 선비들, 특히 글씨 잘 쓰는 선비들은 복 받았다. 몇백년이 지난 지금의 일개 필부인 나도 이런 글을 쓰면서 그 냥반들의 이름을 한번쯤 되새긴다. 이 서원이 남는 한, 송준길이나 윤봉구라는 이름도 계속 남을 것이다. 솔직히 부럽당......

 

 

학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숭의재. 사실 필암서원에서 꼭 봐야 하는 건물이 강당인 청절당과 경장각, 사당인 우동사라고 하는데, 나는 그런 건물보다 이런 소박한 건물이 훨씬 좋다. 정감도 있고.... 낮은 기단에 낮은 마루.... 곧 방안에서 삼월이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길 것 같은 그런 소박하고 순수한 건물.....ㅎㅎㅎ

 

 

하서 선생은 인종이 승하하고, 그 뒤로 인종의 기일만 되면 북쪽 하늘은 보고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인종에 대한 연모의 정을 유소사라는 시로도 읊었는데, 사랑하고 존경하는 남편을 잃은 가련한 여인의 피맺힌 한... 머 이런 내용이라고 한다. 후에 하서의 절의를 높게 평가한 정조는 필암서원에 '경장각' 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는데.... 바로 그 경장각이다.

 

 

이게 경장각敬藏閣이라고?? 음.... 그렇댄다. 글씨는 정조가 직접 썼고. 잘은 모르겠지만 글에서 힘이 느껴진다. 인종이 하사한 묵죽도와 묵죽도판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

 

 

사당 이름이 우동사祐東祠다. 필암서원의 건물 이름은 대부분 하서 선생의 고귀한 절의와 인품에서 따 왔다고 하는데..... 이 우동사 역시 하늘의 도움祐으로 인하여, 우리 동방東에 태어난 이가 바로 하서 김선생이다... 라는 뜻에서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고 한다. 음.... 제자들의 선생에 대한 사랑이 장난이 아니군.... 이 우동사에는 하서 선생 뿐만 아니라 고암 양자징 엉? 중국 사람이냐??? 이라는 냥반의 위패도 모셔셔 있다고 하는데..... 하서 선생의 제자이자, 사위라고 한다. 글을 가르쳤더만, 아주 똑소리가 나서 그냥 사위 삼았다는..... 소쇄원은 지었던 양산보의 아들이기도 하다고.....

 

 

도서 보관소인 장판각과 관리인이 거주하던 한장사이다.

 

 

필암서원이 있는 전라남도 장성이라는 동네는 아주 조그마한 동네입니다. 면적은 서울시와 비슷한데, 인구는 겨우 5만 남짓입니다. 그리고 볼 거리라고는 이 필암서원이 유일하댑니다. 그래서 어떻게 먹고 살 방법을 궁리하던 장성군수는 홍길동이 이 동네에서 태어났다는 점에 착안을 해서 여기 장성에 홍길동 기념관을 만듭니다. 홍길동은 실제로 있었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후에 허균이 소설로 만들었습니다. 홍길동은 그렇게 의적활동을 하다가 결국 추방되어 오키나와로 갔다고 하는데요, 실제 오키나와 기원공원에는 홍가와라 [홍씨성을 가진 왕]기념비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성에는 볼 거리가 하나 더 늘었습니다.

 

 

그리고 이 필암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일제시대, 625를 거치면서도 피해를 면한, 호남 제일의 유학자를 모신 서원입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잠정 등록된 서원이기도 합니다. 머지 않은 시간에 장성군은 세계문화유산을 가진 동네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장성군수... 마냥 기뻐하겠군요...ㅎㅎㅎ

 

 

 

9. 신라 최고의 천재 최치원을 모신 서원 - 무성서원 (전라북도 정읍)

 

 

통일신라때 태산고을이었던 전라북도 정읍시 태산면 무성리에 있는, 우리나라 유학자의 효시이자, 유불선 통합을 주장했던 신라 최고의 천재 고은 최치원 선생(857 ~ ?) 모신 무성서원이 있다. 원래는 태산현 군수를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남긴 최치원을 기리기 위해 세운 태산사泰山祠를 태산서원이라고 불렀는데, 숙종 22년(1696)에 ‘무성武城'이라는 사액을 받아 무성서원이 되었다. 

 

 

서기 868년 어느 날, 당나라로 떠나는 12살의 어린 최치원에게 아버지는 말합니다. "10년 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돌아올 생각일랑 말아라...." 오옷!!! 아버지 마저???  아니? 초등학교 5학년 정도 되는 아이를 혼자 중국 유학을 보냈다고?? 그것도 지금처럼 비행기 타면 두세시간에 도착하는 것도 아니고.... 참 대단한 아버지에, 가는 최치원도 대단하다.....그렇게 당나라 유학을 떠난 최치원은 무려 4년을 단축한 6년만에 당나라 빈공과에 급제합니다. 이 냥반 신라 최고의 천재가 맞습니다.

 

 

중국에 있을 때, 장쑤성 양쪼우 (강소성 양주)에 놀러간 적이 있습니다. 호수가 항주에 있는 서호만큼이나 아름답다고 붙여진 작은 서호가 유명한 동네인데, 역시 거기 가서 뱃놀이도 하고 했더랬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평산당이라는 절 비스무리한 것이 있는데 거기도 돌아보고 그랬는데..... 어??? 한자로 최치원 기념관이라는 간판이 있습니다. 허걱??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최치원 맞나??  이런~~~ 이런 게 있었다면 여기부텀 와서 볼껄..... 안타깝게도 좀 늦은 시간이라 문을 닫혀있고.... 그래도 성벽을 따라 걷는 길이 참 좋았습니다. 간판앞에서 아내를 찍은 사진이 있었는데..... 찾으면 올리겠습니다. 이 글을 쓴다고 찾아보니 최치원 기념관에 대한 자료가 많이 나옵니다. 가 본 사람들도 무척 많구요......

 

 

요런 길을 걸었더랬다. 그땐 사람조차 구경할 수 없었다. 그냥 이 길을 산책하는 게 참 좋았다. 작은 서호에 배탄 것보다 이 길을 걸었던 게 기억에 더 남아있다. 

 

 

요게 최치원 기념관 입구다. 여기서 안으로 못들어가고 그냥 사진만 찍고 나왔다. 성벽 돌담길이 인상적이었던게 아직 기억난다.

 

 

안으로 들어가면 머... 이런 것들이 있댄다. 인터넷에 좀 찾아보니 2007년에 개원했다고 하는데.... 중국 최초의 외국인 기념관이고도 한다.....

 

 

성곽에서 내려다 보면 이런 경치가 나온다. 저 끝까지 내려가서 차들이 다니는 도로까지 걸어가서... 그리고 택시가 안잡혀서 한동안 고생했던 기억도 난다.

 

 

 

 

 

싸이에 올려져 있던 그 때의 사진을 찾았다. 아~~~ 추억의 사진이다. 시간이 별로 많이 흐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아련하고 아련하다.

 

돌아다닐 땐, 지금 보고 있는 것, 느끼고 있는 것을 평생 기억할 것 같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쉽게 묻혀버린다. 어떤 계기가 없으면 기억속에 묻혀있는 그 잔상이나 감동을 꺼내기가 꽤 어렵다. 그래서 사진이 필요하다. 이제는 나의 기억을 나도 못 믿을 정도이니.....

 

 

무성서원의 배치도. 소수서원이나 도산서원같은 위세가 느껴지지 않는, 소박하고 오랜 세월의 냄새를 간직하고 있는 서원이다.

 

 

무성서원의 문루인 현가루. '공자가 무성에서 현악소리에 맞추어 노래 부르는 것을 들었다 子之武城 聞絃假之聲" 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현가루 2층에서 본 조망. 시원하다.

 

 

현가루에서 본 무성서원 간판이 걸려 있는 명륜당.

 

 

무성서원의 명륜당이다. 단청없이 소박하지만, 오랜 향기가 묻어난다.

 

 

강당 내부모습.

 

 

그런 서원에 딩굴고 있는 너는 누구냐???? 그렇게 할 사람은 우리 막내 뿐......

 

 

강당 뒷편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

 

 

사당인 태산사. 고은 최치원 외에도 신잠,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김관 등 6명을 모셨다.

 

 

사당쪽에서 바라 본 서원의 정경

 

 

최치원은 중국에서 급제를 해서 벼슬도 하고, 때론 쉬면서 글을 짓기도 합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건 25살에 지은 '토황소격문'입니다. '온 천하 사람들이 너를 드러내놓고 죽이려 할 뿐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까지 너를 죽이려고 이미 의논했을 것이다' 라는 내용으로, 이것을 본 적장 황소가 놀라 자빠졌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실제로는 소금 밀매상인 황소가 글을 읽을 수 있을지는 의문....

 

 

29살 젊은 나이에 금의환향합니다. 내가 쓰러져가는 신라를 다시 일으켜보리라!!! 시무십조라는 개혁정책을 진성여왕에게 건의합니다. 그러나 기득권인 지배계층 당연히 반발합니다. 저 노무 시키... 당나라 물 좀 먹었다고..... 굴러온 돌이 내꺼 다 뺏들라고 그래..... 또한 이미 신라는 그 시기에 아주 심각한 지경이었습니다. 지방 호족들이 궐기해서, 중앙정부는 이미 손을 써 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미 양길, 기원, 궁예, 건훤 같이 굵직한 인물들이 신라를 털어먹고 있었고, 실제 최치원이 은퇴하는 효공왕 초기 정도에는 이미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현실은 역시 시궁창이었습니다.

 

 

결국 신라와 당나라 모두에서 맞이한 난세에, 자신 같은 인재가 쓰일 곳이 없다는 데 절망한 최치원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은퇴하여 지리산으로 간 뒤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다고 했으며, 전설에 의하면 그가 머물고 있는 집에 신발만 있고, 그의 흔적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를 근거로 후대에는 최치원이 지리산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생기고........ 아래 시는 최치원이 산에 은둔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표현한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이란 시입니다.

 

 

狂噴疊石吼重巒 여러 바위들이 바쁘게 달려 이산저산에 아우성치니

人語難分咫尺間 사람의 말을 지척간에도 분간하기 어렵구나

常恐是非聲到耳 시비가 귀에 들릴까 늘 걱정되어

故敎流水盡籠山 일부러 흐르는 물로 산을 온통 감싸게 한 것이라네

 

 

최치원은 유교, 불교, 도교에 이르기까지 깊은 이해를 지닌 학자이자 문장가였습니다. 하지만 높은 신분제의 벽에 가로막혀, 자신의 뜻을 현실정치에 펼쳐보이지 못하고 깊은 좌절을 안은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가 이룩한 학문과 문장의 경지는 높았으나, 난세를 산 그의 삶은 그가 이룩한 높은 경지만큼 불행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발자취는 아직 많아 있습니다. 부산 해운대의 해운이 바로 최치원의 호 해운에서 딴 이름이며, 마산에 가면 월영동이라고, 무지 큰 동네가 있는데, 이도 최치원이 노닐었다는 월영대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중국에 가면, 그의 기념관 뿐만 아니라, 중국 귀신 자매들이랑 최초로 쓰리썸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을 기념하는 쌍녀분이라는 비석도 남아있습니다.  

 

 

강당 옆 담장너머에 있는 강수재. 보통의 동재와 서재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강수재의 내부공간. 시원한 대청이 좋다. 여름에 앉아 있으면 바람이 그냥 솔솔솔~~~~

 

 

무성서원의 이색적인 것은 항일투쟁비가 여기에 서 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 다음해에 이 고장 800명의 의사들이 횃불을 들고 의병을 일으킨 병오창의가 여기 이 현장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이를 기념한 병오창의기적비丙午倡義紀蹟碑가 여기에 있다.

 

 

 

지금까지 9곳의 서원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사실 5대 서원에 대해서 적으려고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세계문화유산으로 잠정 등록되어 있는 이 서원들도 포스팅을 해야지.... 하고 글을 써다 보니 9개가 되었습니다. 사실 더 쓰고 싶은 서원이 많이 있습니다. 동방오현중의 한명인 정암 조광조 선생을 모신 용인 심곡서원, 율곡 이이의 파주 자운서원, 그리고 남명 조식 선생의 산청 덕천서원과 김해 산해정으로 불리는 신산서원, 사림파 보스 김종직의 밀양 예림서원, 그리고 이용재 선생이 조선 10대 명품 서원으로 꼽을 만 하다고 하신 정몽주 선생을 모신 영천의 임고서원과 동방오현과 좀 한다카는 선비는 모두 다 모신 상주의 도남서원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서원은 한창때는 약 700여개가 있었습니다. 교육과 제사라는 순기능보다 지방 세력들의 중심지라는 역기능이 커지자 대원군은 아얘 서원을 없애 버립니다. 진짜 쫌 한다카는 서원 47개만 남겨두고요.... 지금은 많이 복원도 되고 해서 약 300여개가 있다고 합니다. 웬만한 동네에는 서원이 다 있다는 얘깁니다. 우리 동네에도 있습니다. 남명선생이 처가 살이하러 왔다가 지은 산해정이라고 불리는 신산서원이 차로 집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습니다. 가 봤더니 문은 잠겨있고, 제대로 정비나 관리가 안되어 좀 안타까운 모습이었습니다. 사액서원이 이러니 다른 곳은 더 할겁니다. 이런 문화재를 좀 가꾸어 사람들이 즐기도록 하는데 좀 더 신경을 써 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이글은 네이버의 청도 프로방스, 감래킹, 이길흠의 따뜻한 마음, 이용재의 인문학적 집짓기, 엽토 51의 쏠쏠한 일상, 비니버미의 독서같은 일상 비니버미의 집, 다음의 청솔객이 걷는 길,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소중한 삶을 위하여, 고독한 산책자의 회억의 장, 청현의 쳥현서재, 산사나이의 산사나이, 그리고 네이버 캐스트와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제공하는 한국미의 재발견 - 궁궐 유교건축, 한국문화유사답사회의 답사여행의 길잡이, 그리고 위키백과와 엔하위키에서 사진과 글을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