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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야기

어디까지 가봤니? 울나라 건축물 7 - 가장 귀한 보물, 울나라 국보 건축물 24점

 

 

 

가장 귀한 보물, 울나라 국보 건축물 24

 

  

 

 

 

 

 

 

얼마 전에 3년여간의 보수를 마치고 새로 문을 연 국보1호 숭례문이 부실공사가 되었다고 언론에서 난리를 친 적이 있습니다. 단청도 벗겨지고 기와도 옛날의 그 기와가 아닌 요새 쓰는 기와를 썼고 현판엔 금이가고….. 그래서 급기야 문화재청 청장이 목이 잘리고 감사원까지 나와서 부실목록을 정리한다고 쌩 난리법석을 떨었습니다. 참… 국보 1호를 만드는데도 부실공사라니…. 정말 충공깽입니다.

 

 

 

하지만 언론은 그저 부실공사만 이야기 하지 왜 부실공사가 되었는지는 입 다뭅니다. 왜 그랬는가를 알아야 앞으로 안 그럴텐데…. 실제로 옛날의 그 숭례문을 옛날 방식대로 만들면서 3년이라는 시기는 너무나 짧은 시간입니다. 근데 3년안에 다 지어!!! 라고 하니까 안된다는 말은 못하고…. 어차피 불탄거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정말 정성들여 만들어야 하는 국보1호를 그렇게 졸라 빨리 빨리!! 만 외치다가 이 모양 이 꼬라지가 된 겁니다. 에휴…. 말 하면 머합니까?? 가슴만 아픕니다.

 

 

 

우리의 옛 건축은 나무로 만들었습니다. 돌로 만든 서양과는 달리 그래서 보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국보 1호도 불에 타는 마당에 하물며 집이나 관청건물은 오죽 하겠습니까…. 800년 된 봉정사 극락전이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입니다. 돌로 만들어졌다면 다르겠지요. (참고로 돌탑은 1400년이나 된 것도 있습니다. 아래 사진의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 그 주인공입니다. 젤 오래된 탑입니다.)

 

 

 

 

 

 

그래서 좀 오래된 건물은 죄다 국보입니다. 신라시대 건물은 아예 없구요….. (돌 기단이나 계단 같은 건 남아있습니다.) 고려시대 건물은 다섯개가 남아있습니다. 물론 다 국보구요…. 그래서 찾아보니 울 나라 국보는 모두 317점이 있는데 그 중 건축이 24점이 있습니다. 건물이 아름답고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으니 국가의 보물로 지정이 되었을 겁니다. 자 그럼 한번 살펴볼까요???

 

 

 

 

고려시대

 

 

 

 

서두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고려시대 건물은 딸랑 다섯개가 남아있습니다.(이거는 남아있기만 하면 무조건 국본데…..) 불교가 융성하던 시기라 역시 4점이 절이고 하나는 관청건물입니다.

 

 

 

 

 

1. 봉정사 극락전 (국보 제 15호)

 

 

 

 

 

 

울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부석사의 무량수전보다 13년 앞선 1363년 중수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보통 처음 지어지고 약 150년 후에 중수를 한다고 하니  1200년대 초반에 지어졌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극락전이라고 해서 거기서 빌면 무조건 극락에 가는 줄 았았더마… 절에서 부처님을 모시는 곳이 대웅전이고 아미타불을 보시는 곳이 무량수전(아미타불의 나이가 너무 많아서?) 혹은 극락전이라고 합니다. 서방 극락정토를 담당하는 부처님이 이분이시라네요….

 

 

봉정사는 자그마한 절이지만 그 역사는 오래되었습니다. 의상대사라고 아시죠.... 그 왜 원효대사랑 같이 중국에 유학가다가, 원효는 해골 바가지에 고여 있는 물을 마시고 아!!! 이 맛이야!!! 하면서 신라로 돌아오고, 의상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야쥐!!! 하면서 중국으로 갔다능.... 사실 의상과 원효는 차이가 좀 있습니다. 원효는 귀족출신이고 의상은 왕족 출신입니다. 그리고 의상은 어릴 때부터 거의 슈퍼스타였습니다....

 

 

이야기가 좀 길어졌습니다만, 의상의 유명한 제자 10명을 10철이라 부르는데요 義湘十哲, 그 중의 한분인 능인대사가 언니들의 갖은 유혹을 물리치고 꼴리는 것도 참아가며, 여기서 수행을 해서 봉황도 감복하여 내려왔다 간 절이라 봉정사라 부릅니다.

 

 

 

 

 

 

 

 

작은 절이지만 국보 건축물도 두개나 있습니다. 거의 800살이 다 되어가는 이 극락전이 그렇구요, 대웅전 또한 국보 건축물입니다. 영산암이라는 암자도 빼어난 절경을 자랑합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이라는 꽤 오래된 영화의 촬영지입니다. 배용균이라는 감독이 9년간에 걸쳐 구도자의 길을 걷듯 완성해 낸 작품이라고 합니다.

 

 

근데 실제 가서 이 극락전을 보면 좀 실망입니다. 단청을 아주 진한 화학 안료를 써서 칠하는 바람에 별로 오래 안되어 보입니다. 무량수전에 비하면 영 안습입니다. 좀 안타깝습니다. 오히려 대웅전이나 영산암의 우화루를 비롯한 여러 건물들이 더 고졸해 보입니다. 그래도 목재를 쌓아서 만든 한국건축의 구조미를 잘 보여주는 건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2. 부석사 무량수전 (국보 제 18호)

 

 

 

 

 

 

그 유명한 배흘림 기둥의 정수를 보여주는, 현존하는 가장 아름다운 목조건물로 평가받는 부석사 무량수전입니다. 특히나 이 건물을 보러 갈라치면 안양루 밑 계단을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낮추어 올라가면 쨘~~~ 하고 무량수전이 나타납니다. 부처님 앞에서 몸을 낮춰 겸손하라는 옛 장인들의 이야기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신라의 수퍼스타 스님 의상대사가 중국 유학길에 오릅니다. 수퍼스타라 역시 언니가 있습니다. 미스 신라 선묘낭자입니다. 나도 따라 중국 갈래!!! 그러나 의상대사, 단호히 내치고 떠납니다. 그렇담 내가 죽어 용이 되어 따라가리라. 그리고 다른 언니들이 우리 의상 못 건딜게 할꺼야!! 그래서 선묘낭자는 강에 몸을 던져 용이 되고..... 포교를 위해 영주 산골짜기에 온 의상은, 미리 여기에 자리잡은 험상궂은 형님들을 만나게 되는데..... 용이 된 선묘가 큰 돌들을 들었다 놨다 몇번 하니까 형님들 의상대사에게 무릎은 꿇고.... 그래서 여기 이 절이 부석사가 되었다능.....

 

 

 

 

 

 

무량수전 앞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꼽히는 국보 17호 부석사 석등이 있습니다. 무량수전은 750살인데, 이 석등은 1100살입니다. 의상대사가 676년 문무왕의 명을 받들어 소박한 절로 창건한 뒤 9세기 경문왕 때 크게 번성하여 지었는데, 석등도 그 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자세히 보면 석등에 보살들이 우아하게 세겨져 있습니다.

 

 

유홍준선생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서 바라보는 풍경이라 했습니다. 건축물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건축물이 바라보는 풍경도 아름답다고…. 그래서 그 풍경을 바라봐야 된다고….

 

 

 

 

 

 

꼭 10년 전인 2004년의 사진입니다. 저 사진 찍느라 자고 있는 산이는 안양루에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기억이 납니다. 초등학교 5학년인 우리 드리가 아기인거 보다 제가 저렇게 젊다는 게 참.... 겨우 10년 전인데..... 쩝쩝....

 

 

 

 

 

3. 부석사 조사당 (국보 제 19호)

 

 

 

 

 

 

 

 

무량수전 뒤쪽으로 올라가면 있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소박한 건물인데 이 역시 고려시대 건물입니다. 무량수전이 하도 뛰어나 좀 묻히긴 합니다만…. 이 또한 훌륭한 건축물입니다. 한 절에 고려시대 건축물이 두개나 남아 있습니다. 축북할 일입니다.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짝대기를 조사당 처마밑에 꽂았더니 가지가 생기고 잎이 피어 항상 푸르게 자랐다는 선비화禪扉花입니다. 퇴계 이황 선생이 여기에 와서 이 선비화를 보고 시를 지었다고 하니 신라시대는 몰라도 조선시대부터 있었다는 이야기인데요... 설마 이 나무가 500년??? 이 잎을 삶아서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로, 동네 여인들이 마구 잎을 따서 나무가 많이 상했다능... 그래서 이렇게 철망으로 보호한다능....

 

 

 

 

 

 

의상대사는 720년에 입적할 때까지 이 부석사에서 머물렀다고 합니다. 조사당 안의 이 분이 의상대사지 싶습니다. 이 조사당은 건물 그 자체로서도 국보로 지정될 만큼 값어치가 있는 건물이지만, 건물 내부에 있는 고려 벽화도 건물에 못지 않은 국보입니다. 지금은 따로 떼어내어 부석사 박물관에 저장해 놓고 있습니다.

 

 

 

 

 

 

 

 

박물관에 보관중인 부석사 조사당 벽화 (국보 제 46호)입니다. 위로부터 차례로 제석천, 사대천왕인 서방광목천왕, 남방증장천왕, 동방지국천왕, 북방다문천왕, 그리고 범천입니다. 고려시대 불화의 품격을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건물 나이와 비슷하며 현존하는 벽화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이면서 회화사적으로도 아주 중요하다고 합니다.

 

 

 

 

 

4. 수덕사 대웅전 (국보 제 49호)

 

 

 

 

 

 

 

 

 

'머리나 깎고 산에 들어갈까부다' 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자주 하는 말인데요, 스님이 되는 것.... 요즘은 쉽지가 않습니다. 15세 이상 40세 이하의 고졸 이상 학력이어야 하며 절에 들어가면 일단 설겆이만 6개월 하고, 새벽 3시부터 예불드리고, 하루 10시간동안 가부좌로 부처님께 정진해야 되며, 밥은 오로지 나물과 먹고, 무엇보다 언니하고 노는 것은 절대 안되고.... 이렇게 4년을 하면 스님 면허증이 나온다고 합니다. 음.... 역시나 스님의 길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수덕사 대웅전은 창건연대가 정확히 밝혀진 것으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입니다 (1308년 창건). 사실 봉정사 극락전이나 부석사 무량수전은 추측을 할 따름입니다. 수덕사 대웅전, 참 예쁜 건물입니다... 아름다운 절 건축을 뽑아도 항상 다섯손가락 안에는 아마 들어갈 겁니다. 독립기념관이 이 건물을 본따 만들었다는데…. 좀 잘못 본따서 엉망이 되었다는……ㅋㅋ

 

 

참고로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봉정사 극락전과 많이 비교되기도 합니다. 3칸 건물에 단정한 맞배지붕, 주심포식 건물.... 공통적인 사항입니다만, 극락전은 신라의 양식을 본받았고, 수덕사 대웅전은 백제의 양식을 본받았습니다. 주두의 받침대 유무에 따라 그렇다고 하는데요... 머 그렇댑니다. 저도 책에서 얼핏 읽었습니다. 한번 비교해서 보는 것도 재미일 것 같습니다.

 

 

 

 

 

5. 강릉 임영관 삼문 (국보 제 51호)

 

 

 

 

 

 

 

 

 

보이십니까? 기둥의 저 볼록함??? 현존하는 건물중에 기둥의 배흘림이 가장 두드러진 건물입니다. 고려시대 건물로 남아있는 유일한 관청건물이며, 절집을 제외하고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기도 합니다. 저 수덕사 대웅전보다 더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강원도 건축물중에 유일한 국보 건축물입니다. 이 건물은 강릉 객사의 정문이라 객사문이라고도 하는데요, 객사라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나라가 운영하는 호텔 같은 겁니다. 그 시절에 뭐 비행기나 KTX가 있는 것도 아니고 관리들이 말타고 혹은 걸어가다 묵어가는 곳입니다. 아마 언니들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강릉 객사는 임영관이라는 이름으로 무려 83칸이나 있었던 아주 대규모 호텔이었는데요….. 조선시대에도 계속 객사로 사용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 강릉초등학교로 쓰이기도 하고, 그러다가 일제에 의해 헐리고, 염치없는 넘들이 뜯어가고..... 남산의 오성정, 경포의 방해정, 금산의 월화정이 객사를 뜯어가서 만든 것이라고 하는군요..... 그래서 이래저래 다 없어지고 객사로 들어가는 정문인 이 문만 남았습니다.

 

 

1992년 버려진 객사 터를 팝니다. 시청을 새로 짓는댑니다. 근데 파다보니 땅속이 아주 장관입니다. 개사 기초로 사용한 돌들이 즐비합니다. 문화재청 관계자들이 오고, 강원도 박물관팀에서도 오고.... 여그가 임영관터가 학실합니다!!!! 당연하지. 객사문이 있는데.... 2000년부터 임영관의 복원이 시작됩니다.

 

 

강릉 임영관 삼문, 속칭 객사문은 배흘림기둥에 주심포계열의 맞배지붕인 고려시대 건축양식을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소박하지만 아주 세련미가 물씬 풍기는 건물입니다.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수덕사 대웅전, 그리고 이 강릉 객사문을 보고 있자면 목조 건물의 전성기는 오히려 고려시대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고려시대가 절 건물이 대표작이었다면 조선에 와서는 다양해집니다. 궁궐과 관청건축이 있구요, 향교나 서원 같은 학교건축도 있습니다. 그리고 대감님 집이나 정자 같은 것도 있구요. 그래도 대표선수는 절입니다. 절이 11점 궁궐 및 성곽이 5점 관청이 2점 해서 총 19점의 건축물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6. 숭례문 (국보 제 1호)

 

 

 

 

 

 

언제적일까요? 적어도 100년 전은 되어 보이는데....ㅎㅎㅎ 일제강점기 초기라고 되어있습니다. 숭례문. 한양도성의 남문으로 국보 1호입니다. 1398년이 준공 되었으니 무려 600년 넘게…. 왜란과 호란 일제치하 한국전쟁에도 살아남은 서울을 상징하는 건물입니다. 예를 숭상하는 문이라… 이름이 좋습니다. 유교의 핵심인 인의예지신을 이름에 넣었다는 군요.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그리고 숙정문(북문) 그리고 보신각.(4대문의 가운데 있댑니다)

 

 

남대문이라는 이름도 정겹습니다. 남대문은 뭐 일제 잔재라서 쓰면 안된다고 그러는데…. 조선시대때도 백성들이 다 남대문이라고 불렀댑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일본잔재론인 겁니다. 불에 탄 안타까운 이야기는 위에서 이야기했지만….. 유홍준 선생이 청장에서 물러난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국보 1호를 잘 지키지 못한 청장이라고 역사에 남을 게 참 안타깝다고 그러네요, 그러고 보니 우리 숭례문은 문화재청장 둘의 목을 날렸군요… 불나서 그리고 새로 잘못 만들어서…

 

 

 

 

 

 

 

 

볼 때마다 가슴 아픈 사진이긴 하지만.... 정말 교훈으로 삼고, 그리고 문화재청에 예산도 팍팍 지원하고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강바닥에 돈 쏟아 붙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정말 잘 지키고 가꿔서 앞으로 천년은 거뜬없이 서 있기를 기원합니다.

 

 

 

 

 

7. 무위사 극락보전 (국보 제 13호)

 

 

 

 

 

 

무위無爲사는 이름처럼 소박하고 담담하여 원래부터 또 언제까지나 그대로일 법한 편안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절집입니다. 제가 가 본 절집중에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세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절입니다. 절 앞의 아름드리 나무들도 참 좋았습니다.

 

 

 

 

 

 

잠깐 극락보전에 대해 문화재청의 설명을 볼까요….. 조선 초기에는 궁궐이나 관아, 성곽, 서원이나 학교 같은 학교 건축이 많이 지어졌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 지은 많은 건물들은 임진왜란을 겪은 뒤로 불에 타거나 훼손되어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이런 가운데 세종 때인 1430년에 지은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은, 드물게 현존하는 조선 초기 목조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다. 무위사 극락보전은 주심포 양식의 전형적인 규범을 유지하는 주심포계 완성기의 건물이다. 고려 말기에 원나라를 통하여 다포계 건축 기법이 전래되었지만, 조선 초기까지는 주심포 건물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조선 중기 이후로는 다포계 집이 주로 지어졌다. 무위사 극락보전이 건축사에 있어 중요하게 자리매김 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양식상의 연륜 때문이다… 라고 적혀있습니다…… 핵핵……

 

 

주심포, 다포, 머 조금 생소한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절집 앞에 가보면 건축물을 설명할 때 항상 이런게 나옵니다. 사실 전혀 어려운게 아니구요…..기둥위에 보면 지붕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나무 장식물 같은게 있습니다. 그걸 포 라고 하는데요… 이게 기둥위에만 있음 주심포구요…. 여기저기 많이 있으면 다포식 건물입니다. 이 포라는게 웅장하고 멋있으면 건물이 폼나게 보입니다. 고려시대 건축물을 다 주심포식이구요… 아래 사진은 주심포의 대표 건물이며, 가장 아름다운 포를 가진 건축물중의 하나라 평가받는 부석사 무량수전의 그 공포입니다.

 

 

 

 

 

 

강진 무위사의 극락보전은 소박하지만 기품이 있는 건물입니다. 눈에 확 다가오지 않고 어느 하나 좋은 것도 없는 건물이지만 종일 봐도 질릴 것 같지 않은, 보고 있으면 무위라는 뜻을 알 것도 같은 그런 매력이 있는 건물입니다. 단아한 절 무위사의 늙었지만 기품이 있는 극락보전. 지금이라도 얼른 달려가서 보고 싶습니다.

 

 

 

 

 

8. 거조암 영산전 (국보 제 14호)

 

 

 

 

 

 

 

 

 

 

 

 

 

 

 

 

 

 

고려시대에 처음 지어졌고, 조선 초기에 다시 지어진 걸로 추정됩니다. 얘는 사진에서 보다시피 좀 길쭉합니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국보는 다 정면 세칸짜리 건물입니다. 우리 옛날의 초가집도 다 세칸짜리였습니다. 뭐 아파트로 치자면 스무평짜리 젤 작은 기본 평수의 건물이라는 뜻입니다. (기둥과 기둥사이를 한칸이라 부릅니다. 그러니까 정면에서 보면 기둥이 네개에 세칸이 됩니다. 좀 규모가 있는 부석사 무량수전은 다섯칸짜리 건물입니다) 근데 얘는 무려 7칸짜리 건물입니다. 게다가 창문도 있습니다. 잘 보기 힘든 건물입니다. 아마도 창고 같은 것(불경을 저장하거나…)으로 쓰이다 불전으로 바뀐게 아닌가 싶습니다.

 

 

가보고 싶은 절집이지만 아직 못 가본 곳이 많이 있습니다. 와불이 있는 화순 운주사가 그렇고 마음을 열어주는 서산 개심사, 동백꽃이 후두둑 떨어지는 고창 선운사, 군산에 있는 일본식 절집 동국사도 가 보고 싶습니다. 아직 못 가봤지만 참 가보고 싶은 절집 10선.... 머 이런 제목으로 글을 하나 써야 되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공부도 할겸... 이 영산전은 이름조차 생소한 절집입니다. 이거 공부하면서 첨 알았습니다. 경북 영천의 은해사에 속해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영천이 도대체 어디 있는지 부터 찾아봅니다. 대구와 포항사이에 있군요.... 이거 지리공부도 많이 됩니다.ㅋㅋㅋ

 

 

그래서 거조암으로 가 봅니다. 영천에 가면 참..... 정몽주 선생의 임고서원도 봐야 되는데...... ㅎㅎㅎ 거조암으로 가는 길은, 오직 거조암으로 가는 길 같습니다. 뭔가 하나의 목적으로만 가는 길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가보면 역시나 거조암 달랑 하나가 있습니다. 새로 만든 것 같은 영산루가 나옵니다. 영산전은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영산루의 계단을 올라서면, 쨔잔!!! 하고 그 거대한 몸집을 드러냅니다. 넓은 대지에 건물들도 다 떨어져 있어 원근감 때문에 일반 절집과 다름없이 보이나, 가까이 가면 볼륨감이 상당합니다. 그래고 영산전 내부에 들어가면 더욱 거대한 공간감을 느낍니다.

 

 

영산전은 딱 이 건물 하나로 사람 마음을 잡습니다. 상당히 큰 몸집임에도 불구하고 간결하면서, 깔끔합니다. 군더더기가 없는 건물입니다. 영산전은 안의 오백나한도 상당히 유명한데, 제 눈에는 건물만 보였습니다..... 오백 아라한, 미안해~~~~

 

 

 

 

 

 

거조암은 팔공산 은해사의 암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은해사는 또 뭔가 하고 찾아봤더니, 현판이 그렇게 유명하댑니다.  불광. 추사체의 시초라고 하는 군요.... 봉은사 현판인 판전만 유명한 줄 알았지.... 그러고 나서 글씨를 보니, 음.... 달라 보입니다. 간송 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의 평을 빌리자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모두가 허술한듯 한데 어디에서도 빈틈을 찾을 수가 없다..... 앗!! 어디서 많이 들어보던 표현인데..... 무릇 고수는 이러합니다. 그려......

 

 

 

 

 

9. 도갑사 해탈문 (국보 제 50호)

 

 

 

 

 

 

 

 

이 문을 지나면 모든 고민과 번뇌가 사라질까요? 정말 그런 문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쨘~~~ 하고 다시 태어나는....

 

 

도갑사는 강진 월출산에 있습니다. 1977년에 참배객의 부주의로 큰 불이 나서 해탈문만 빼고 거의 다 탔다고 합니다. 나머지 건물은 다 최근에 복원된 것입니다. 흔하지 않은 산문山門건축이라는데 산문이라는게 절 입구에서 부처님이 계시는 대웅전까지 가는 데 거치는 문을 말합니다. 보통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등이 있습니다. 올라가는 계단의 소맷부리가 고졸한 분위기를 물씬 풍깁니다.

 

 

 

 

 

10. 해인사 장경판전 (국보 제 52호)

 

 

 

 

 

 

이거 유네스코 세계유산입니다. 팔만대장경이 그렇다고 알고 있는데, 팔만대장경은 세계기록유산이고, 이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은 세계문화유산입니다 (어디까지 가봤니? 울나라 건축물 1 - 세계문화유산 편 참조) 장경판전은 4개의 건물인데요… 무려 15칸짜리 긴 건물 2채와 2칸짜리 짧은 건물 2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건물의 목적은 대장경을 잘 보관하면 됩니다. 즉 창고의 역할인데요… 대장경이 가장 적절한 온도와 습도에서 안 상하게 잘 보존될 수 있도록 아주 과학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근데 보수한다꼬 이래저래 훼손하더마 요즘은 옛날의 그 기능들이 더 안난다고…. 예전에 교수님께서 그러셨던 기억이 납니다. 공기청정기랑 제습기랑 사줘야 하나…… 

 

 

 

 

 

11. 법주사 팔상전 (국보 제 55호)

 

 

 

 

 

 

옛날에는 탑도 나무로 많이 만들어졌더랬습니다. 그 유명한 황룡사의 구층목탑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전란에 다 타버리고 이제 목탑형식의 건축물은 이거 달랑 하나 남아있습니다. 속리산의 이 법주사 팔상전도 본래 신라 때 만들어 졌는데,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하도 일본놈들을 괴롭히니까 화가 난 그넘들이 다 태워버립니다. 그 후 일본가서 도술로 일본 애들 자지러지게 했다는 전설의 사명대사가 다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기단부와 돌계단은 신라때의 그것이라고 합니다.

 

 

 

 

 

 

오층목탑의 형식을 갖추었는데요... 현재 남아있는 제일 높은 목탑건축물이기도 합니다. 아마 그 시절에는 초고층 건물이었을 겁니다. 딱 보면 거대하다라는 인상을 줍니다. 절에가서 볼 수 있는 이 정도 크기의 건물은 금산사 미륵전이나 화엄사 각황전 정도일 겁니다

 

 

팔상전이라는 이름은 팔상도를 모신 건물이라는 뜻입니다. 팔상도는 부처의 일생을 여덟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인데요,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장면,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는 장면, 궁궐의 문 밖으로 나가 세상을 관찰하는 장면, 성을 넘어 출가하는 장면, 설산에서 고행하는 장면, 보리수 아래에서 마귀를 항복시키는 장면, 성불한 후 처음으로 녹야원에서 설법하는 장면, 보리수 아래에서 열반하는 장면 등입니다.

 

 

 

 

 

12. 송광사 국사전 (국보 제 56호)

 

 

 

 

 

 

 

 

송광사는 우리나라 3대 절로 꼽힙니다. 왜요??? 여기서 훌륭한 스님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 승자를 써서 승보사찰이라고도 불립니다. (부처님의 진짜 사리가 묻혀있다는 불보 통도사와 대장경이 있는 법보 해인사가 그 삼보사찰입니다. 이것에 구례 화엄사와 부산 범어사를 넣어 5대 사찰로 부르기도 합니다)

 

 

 

 

 

 

불료의 종파는 크게 두갈래로 나눕니다. 열심히 부처님의 말씀을 공부해서 진리를 터득하는 교종과 땅굴파고 홀로 동굴속에 들어가서 가부좌 틀고 앉아 도를 터득하는 선종이 있습니다. 이 선종의 우두머가 바로 동쪽으로 가신 달마입니다. 고려 초기에는 이 교학을 중심으로 하는 교종이 번성했습니다. 보조국사 지눌(위 사진 1158 ~ 1210)은 이 시기에 불교가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하고 선종과 교종이 서로 싸우고 하는 것에 고민하여 여기 송광사에서 설법을 합니다.

 

 

교선이 따로 없다. 단박에 깨닫고 점진적으로 수행하라! 돈오점수頓悟漸修 참선과 지혜를 같이 닦아라! 정혜쌍수定慧雙修 중생없이 부처도 없고 또한 더와 내가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엥?? 공부 열씨미 한다고 부처가 되는게 아니라 깨닫지만 하면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사람들 열광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고 오늘날까지 한국 불교의 중심이 되는 조계종을 창시합니다. 크헉.... 이거 불교공부도 되고..... 중학교 역사시간에 얼핏 배운거 같기도 하고....ㅋㅋㅋ 아웅 힘들어....

 

 

 

 

 

 

송광사 국사전은 이 절에서 나온 열여섯분의 나라의 스승이 되는 스님, 즉 국사의 영정을 모신 곳입니다. 송광사를 지을 때 18명의 위인이 나온다고 했다니까 아직 두분 더 나와야 합니다....ㅎㅎㅎ 보통 전통건축은 3,5,7칸으로 나가는데 이 국사전은 정면 4칸짜리 건물입니다. 좀 이채롭습니다. 천장의 연화 무늬나 대들보의 용 무늬 등은 600년 전의 것으로 매우 희귀하다는데, 볼 수는 없습니다. 송광사에서 이 국사전은 대웅전보다 더 높은 위치라 일반인에게 개방을 하지 않습니다. 일년에 딱 한번 개방한다고 합니다.

 

 

 

 

 

13. 금산사 미륵전 (국보 제 62호)

 

 

 

 

 

 

절은 왜 산속에 있을까요? 절이 저잣거리 있음 이쁜 언니들도 있고 하니까… 언니들 보면 좀 꼴리고 하니까…..산 속이 조용해서 불경 공부하고 도 닦기 좋아서일까요?? 어릴 때 조선시대때는 유교를 팍팍 밀어줘서 절이 다 산으로 도망갔다고 배웠습니다만…..요즘도 보면 도심과 평야지역에는 온통 다 십자가가 차지하고 있어서 보기가 영 그렇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저거가 머 한게 있습니까?? 맨날 저거끼리만 뭉쳐서…… 대한민국에 교회가 치킨집보다 더 많다고....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통폐합하듯 저것들도 한번 통폐합을 해야..... 하긴 우리 드리야도 교회 오빠보러 주일마다 가긴 합니다만…..ㅋㅋ

 

 

 

 

 

 

말이 잠깐 샜습니다만…..보통 불당은 단층건물입니다만 전북 김제에 있는 이 미륵전은 3층짜리 불당입니다. 사실 바깥에서 보면 3층 건물로 되어 있습니다만 안은 팔상전도 그렇고 다 통층입니다. 아마 슬라브를 설치하는 게 쉽지 않아서 그럴까? 아님 졸라 큰 불상 넣을라고 일부러 그랬나?? 여하간, 건물이 장중하고 든든한 것이 폼 납니다. 안에는 약 12m나 되는 미륵입상이 있습니다.

 

 

유독 전라도와 충청도 지방의 옛 백제 땅에서만 이와 같은 다층 불전의 형식이 드러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다층 불전의 형식은 백제계 건축의 특성이 아닌가 추정되기도 합니다.

 

 

 

 

 

14. 화엄사 각황전 (국보 제 67호)

 

 

 

 

 

 

 

 

절집 중에서도 장중한 위엄을 자랑하면서도 화려함을 뽐내는 건물입니다. 킹 오브 절입니다. 나가 왕이여 왕!!! 정면 7칸 측면 5칸의 매우 큰 건물이며 지붕은 옆에서 보면 여덟 팔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며 기둥과 기둥사이에도 공포가 있는 다포식 건물입니다. 어떤 절집이 예쁠까여? 라는 물음에 꼭 손에 꼽히는 건물입니다. 보통 건물이 크면 아름다움하고는 거리가 멀어지는데, 우리의 건물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경회루도 그렇고 이 각황전도 그렇고, 건물이 웅장하면서 아름답습니다.

 

 

 

 

 

 

 

 

 

 

 

 

기둥과 기둥사이에도 포가 있는 다포식 건물….. 화려하게 보입니다. 보통 다포식 건물은 조선 중기 이후에서 완연히 나타납니다. 건물을 받치는 석축도 장대하며 그 석축에 놓은 계단도 물론 장대합니다. 화엄사에 가면 이 각황전도 무지 유명하지만, 이 각황전 만큼이나 유명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각황전 앞의 석등 (국보 제 12호) 입니다. 이 석등은 각황전을 닮아서 울 나라에서 가장 큽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석등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제 눈에는 커다랗기만 커다란, 좀 볼품없는 석등처럼 보입니다만.... 하여간 크기는 6.4m 나 되는 엄청난 석등입니다. 가장 아름답다는 부석사 석등과 비교해서 보면 재미있을 것도 같습니다.

 

 

 

 

산이 들이 강이가 다 나오는 사진이군여..... 반갑습니다. 2012년 9월로 찍힌 날짜가 되어 있습니다.

 

 

 

이름이 특이해서 살펴보니 깨우칠 각 임금 황입니다. 어떤 스님이 숙종인 왕을 깨우치게 하여 이 절의 중건을 하게 해서 임금이 이렇게 이름을 지어 하사했다 합니다. 화엄사에 가면 각황전 이외에도 작지만 좋은 건물이 많은데요….아래 사진처럼 구층암이라는 희한하게 생긴 기둥을 가진 건물도 볼 만 합니다.

 

 

 

 

 

 

 

 

 

15. 경복궁 근정전 (국보 제 223호)

 

 

 

 

 

 

드라마에 보면 임금이 저 높은 곳에 앉아있고 빨간당과 파란당의 신하들이 양쪽에 대가리 처박고 엎드리고 저넘들을 죽여야 마땅합니다…. 라고 하던 곳이 바로 이 근정전입니다. 경복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입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의…. 그 충격의 경복궁입니다.. 그래도 근정전은 살아남았습니다. 우리 문화유산을 이야기 할 때 꼭 나오는게 일본넘들입니다. 임진왜란 때 어떻게 잘 살아남았다 치면 꼭 일제시대 땐 어떻게든 훼손이 됩니다. 여러가지로 나쁜 넘들이나, 이 부분에 대서는 특히 나쁜 넘들입니다. 굳이 그렇게 안 할 수도 있었을텐데....

 

 

 

 

 

 

 

 

저 자리가 폼은 좀 나지만 졸라 머리 아픈 자리이었을 거다....

 

 

경복궁 대부분의 건물이 그렇듯이 임진왜란 당시 다 소실되고 한 200년 그대로 방치해 두다가 돈이 없어서??? 흥선대원군이 이거는 빚을 내어서라도 재건해야쥐…. 해서 대원군 시절에 당백전까지 발행하면서 복원되었습니다. 근정전이라는 건물 이름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부지런히 힘써라 라는 말이랍니다. 지금의 임금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합니다.

 

 

근정전 앞에는 박석이 깔린 넓은 마당이 있는데요, 이 마당을 조정(朝廷)이라 부릅니다. 조정을 가로질러 근정전으로 이어지는 길 좌우로는 비석 모양의 품계석이 놓여 있는데, 근정전에서 행사가 치러질 때 신하들은 각자 자기의 신분에 해당하는 위치를 찾아가 자리합니다. 1품에서 9품까지 있습니다. 현재의 공무원 등급과 조선시대 벼슬이 똑 같습니다. 박석이 울퉁불퉁한 까닭은 햇빛을 분산시켜 눈부심을 없애기 위함입니다.

 

 

 

 

 

16. 경복궁 경회루 (국보 제 224호)

 

 

 

 

 

 

경회루는 이름 그대로 경사스러운 날 잔치를 벌이고 노는 누각입니다. 임금이 함 땡긴다 싶음 무수리 언니들 데리고 나와서 술도 푸고 언니도 푸고 하는 곳입니다. 술 푸다가 지겨우면 앞 연못에서 이쁜 무수리언니랑 오리보트도 타고…. 아웅… 부러워……

 

 

 

 

 

 

여럿이 놀아야 되니까 건물이 큽니다. 그리고 언니들 하고 놀아야 되니 건물도 아름답습니다….ㅎㅎ 근정전이 정면 5칸 측면 5칸으로 총 25칸인데 반해 경회루는 정면 7칸 측면 5 35칸 건물입니다. 물론 칸이 많다고 꼭 큰 건물은 아닙니다만…. 그래서 근정전은 정면 30m 측면 21m 높이 22.5m(기단제외)지만 경회루는 정면 34.4m 측면 28.5m 높이 21.5m로 현존하는 울 나라의 목조 건물중에서 가장 큽니다. (다만 면적이 가장 넓은 건물은 정면 75m 측면 14m의 여수 진남관입니다). 목조건물로 지을 수 있는 최대치라고 합니다. 크고 또한 아름다운 건물입니다.

 

 

잡상雜像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게 살을 막기 위해 지붕에 올려놓은 동물 같은 것인데여…. 보통 서유기에 나오는 캐릭터를 많이 쓴다고 합니다. 여하간 중요한 건물에는 이런 게 있습니다. 이게 많으면 중요한 건물이라고 하는데요….. 경회루는 11개가 올려져 있습니다. 울나라 건물중에 잡상이 제일 많습니다.

 

 

그래서 함 찾아보니 중국은 북경 자금성 정전인 태화전은 10개 경복궁의 정전-근정전 지붕에는 7개 지만, 경회루에는 11개 창덕궁 정전 인정전에는 9, 창경궁 정전 명정전에는 5개입니다. 건물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런 거 개무시하고 지 올려놓고 싶은 만큼 올린 것 같습니다. ㅎㅎ

 

 

 

 

 

 

숙정문(북대문)의 잡상입니다. 좀 앙증맞습니다.

 

 

 

 

 

17. 창덕궁 인정전 (국보 제 225호)

 

 

 

 

 

 

경복궁이 조선의 궁궐이지만 조선왕조에서 실제로 가장 오랜 기간동안 궁궐로 쓰인 곳이 바로 이 창덕궁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이 재건될 때까지 궁궐로 쓰였구요… 왕들이 경복궁은 피비린내가 난다고 별로 좋아 안했답니다. 경복궁이 중앙축을 중심으로 하여 좀 엄격한 건물배치라면 창덕궁은 그보다 훨씬 자유롭습니다. 머… 짓는 넘 맘대로 여기저기 지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창경궁 종묘 창덕궁 이렇게 분리되어 있지만 옛날에는 그냥 다 한 궁궐이었습니다. 일제가 도로를 만들면서 분리되었다는 군요.

 

 

 

 

 

 

 

 

창덕궁의 근정전이 바로 이 인정전입니다. 부지런하게 사람을 보살피라 라는 게 근정전이라면 어질게 보살피라 해서 인정전입니다. 근정전이랑 생김새도 비슷합니다만 좀 규모가 작습니다. 근정전의 동생쯤 되는 건물입니다.

 

 

 

 

 

 

법궁인 경복궁을 제치고 왕조의 궁궐기능을 지속적으로 해온 창덕궁은 조선 왕조역사에서 중요한 사건들이 이루어진 실질적인 공간이었는데요, 이 인정전은 1910년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된 장소로 조선 왕조가 마침표를 찍게 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창덕궁은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며 자세한 내용은 어디까지 가봤니? 울나라 건축물 1 - 세계문화유산편에 보면 창덕궁, 특히 낙선재에 대해서 잘 나와 있습니다.

 

 

 

 

 

18. 창경궁 명정전 (국보 제 226호)

 

 

 

 

 

 

 

창경궁은 궁궐이긴 하지만 왕이 신하들과 정치잡답을 하는 궁궐과는 달리 왕의 어르신들 그러니까 대왕대비마마 머 이런 분들이 기거를 하기 위한 장소였습니다. 그 창경궁의 정전이 명정전이구요…. 그래도 역사적으로는 장희빈이 농약을 묵고 헐 한 곳이 여기이며 사도세자가 두지에 갇혀 죽고 그 아들 정조가 돌아가신 곳도 역시 창경궁이었습니다.

 

 

명색이 궁궐이었는데 일제가 여기다가 동물원도 만들고 벗꽃도 심어 벗꽃놀이도 하고 뭐 그래서 아예 이름도 창경원으로 바꾸었습니다. 근데 이게 해방이후에도 창경원으로 계속 되어 그 시기에 동물원과 놀이동산이 있는 유일한 테마파크역할을 하였습니다. (저도 아주 어릴 때 간 기억이 어렴풋이 나기도 하는데요… 아마 사진도 있지 싶습니다) 그렇게 1983년까지 사용되다 아 이래선 안된다 캐서 코끼리도 다 보내고 궁궐도 복원하고 해서 1986년에 다시 창경궁으로 태어납니다.

 

 

 

 

 

 

이와 같은 부침 가운데에서도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明政殿, 밝은 정치를 펴라는 뜻)은 1616년에 지어진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단층 팔작지붕집으로, 현존하는 궁궐의 정전 가운데는 시대적으로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과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이 모두 중층으로 지어 웅장하고 권위적인 것에 비하여 명정전은 단층입니다. 이는 성종이 할머니인 정희왕후 (세조의 부인) 와 어머니 그리고 작은 어머니를 보시기 위해 창경궁을 건립했던 목적에서도 알 수 있듯, 외전 보다는 내전이 더 발달한 창경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9. 종묘 정전 (국보 제 227호)

 

 

 

 

 

 

딸에게 종묘가 뭐하는 덴 줄 아냐고 카톡으로 물었더만… 날라오는 대답이 이렇습니다. “조선왕조의 왕과 왕비, 그리고 죽은 후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 음…. 검색이 참 편리하군…. 맞다 하기도 그렇고 아니다 하기도 그렇고…. 다시… 우리는 할배 제사 어디서 지내? 라고 물으니 할머니 집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임금님들 제사 지내는 곳이라고 하니 지도 좀 이해가 되는 모양입니다.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한 종묘에서 정전은 죽은 왕들의 신주를 보관하는 곳입니다. 본래는 그렇게 크지 않았는데 왕이 죽으면 또 짓고 죽으면 또 짓고 해서 지금 길이가 무려 101m나 됩니다. 조선왕조가 안 망하고 계속 이어졌다면 아마도 기네스북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자세히 보면 기둥의 오래됨이 좀 다릅니다. 서쪽 기둥이 젤루다 오래되었습니다.

 

 

정전은 여러채로 이루어진 건물군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건물을 일컫는 일반명사지만 종묘의 정전은 특별한 이름없이 그냥 정전입니다. 정면 19칸의 엄청난 건물이지만 장식적이지 않고 유교의 수수함이 묻어나는 건축물입니다.

 

 

 

 

 

20.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 (국보 제 290호)

 

 

 

 

 

 

 

 

제가 요즘 유배지에서 사리가 생기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만…… 아내는 알까 몰라….. 일설에 의하면 갈 데를 못찾은 정액들이 저거끼리 굳고 굳고 해서 사리가 된다능….. 여하간 이 사리라는 게 스님 도량의 척도를 가늠하는…. 그래서 요즘은 공개 다비는 안한다는…. 나 쫌 한다는 중인데 사리 안 나오면 쪽팔리니까…… 석가모니는 사리가 여덟섬 네말이 나왔다는…..

 

 

 

 

 

 

통도사는 부처님의 사리가 있는 그래서 3대 사찰중의 하나인 불보사찰입니다. 선덕여왕 때 지장율사라는 분이 당나라에 유학갔다가 얻어왔다는데요….뭐 그렇댑니다. 통도사의 대웅전은 참 특이합니다. 어디에서 봐도 다 정면 같습니다. 또 사방에 걸린 현판이 다 다릅니다.

 

 

1. 동쪽 대웅전, 위대한 영웅 석가모니를 모신 집.

2. 남쪽 금강계단, 불법을 모시는 제단.

3. 서쪽 대광방전, 법신불이 사시는 전각.

4. 북쪽 적멸보궁,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전각.

 

 

법당 내부에는 불상이 없습니다. 사리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죠…. 그리고 금강계단… 올라가는 階段이 아니라 戒壇입니다.

 

 

 

 

 

 

 

 

대웅전의 포입니다. 공포구조의 다양하고 화려함이 그 건물을 어떻게 보이게 하는가 하는 정확한 답은 이 건물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삼년 전엔가 가을에 통도사를 갔었습니다. 통도사은 워낙 큰 절이라 고즈넉한 절집.... 머 이런 거와는 거리가 멉니다. 하지만 통도사의 맨 끝에서 양산 영축산으로 올라가는 그 단풍길은 절경 중의 절경입니다. 사진이 어디 있을텐데.... 찾으면 올리겠습니다. 아마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21. 여수 진남관 (국보 제 304호)

 

 

 

 

 

 

 

 

 

 

 

 

 

 

임진왜란이 끝나고 1599년 이시언이라는 청백리도 하사받은 냥반이 삼도통제사, 지금으로 치면 해군 총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합니다. 원래는 이순신 장군이 지위했던 전라 좌수영의 중심건물인 진해루가 있었는데, 와 보니 진해루는 불 타 없고 초가집만 있습니다. 다시 짓자!! 둘레 2.4m 짜리 기둥만 쭉 세웁니다. 전면으로 16개, 측면 6개.... 전면 15칸 측면 5칸짜리 거대 공간이 생깁니다. 여기다가 살짝 지붕만 얻습니다. 단순하고 심플하면서도 우아하고 장중합니다.

 

 

 

 

 

 

 

많이 컸다~~~~ 이넘들...... 산이 유캉년, 들이 사캉년.....

 

들이야한테 이 넓은 공간에서 옛 사람들은 무엇을 했을까? 하고 물어보니 숨박꼭질을 했을 거라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술래, 잡히면 당직, 혹은 곤장..... 애들 다운 발상입니다. ㅋㅋ

 

 

 

숙종 때 화재로 소실되어 1718년에 재건한 이후로 여러 차례 중수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가뿐히 300살!!! 전쟁때는 물론 사령부로 썼을 테구요, 전쟁이 끝나고 나서 객사로 사용되었습니다.  1910년 무렵부터 1960년대까지는 학교 교실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목조 건물중에 연면적이 가장 큰 건물입니다. 진남관 앞의 새로 생긴 다리에서 보면 진남관의 위용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 위용이 대단한데, 이삼백년 전에는 아마 여수에서 진남관만 보일 정도 였지 싶습니다.

 

 

 

 

 

 22. 충무 세병관 (국보 제 305호)

 

 

 

 

 

 

 

 

집의 가장 큰 역할은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공간입니다. 이 명제를 수행하기 위해 건축재료가 발달이 되고 집짓는 거의 모든 기술이 발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래서 요즘은 아예 외기와 차단이 되어, 바람도 강제 급기, 강제배기, 창문도 거의 열리지 않는 그런 집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사람은 자연에 대한 면역력이 더 떨어져 약해지게 됩니다. 감기환자도 더 늘고요...

 

 

머, 이야기가 잠깐 샜습니다만.... 절집은 불당을 모시기 위해 만들었으니 우선 경건해야 되고 또한 아름다워야 합니다., 궁궐은 왕의 권위를 나타내도록 위압적이고 권위적으로 짓습니다. 장경판전같은 창고는 외관보다 기능에 더 우선하여 짓습니다. 건물을 세워서 생기는 공간을 누가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건물을 짓는 형식이나 방법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진남관도 그렇고 이 세병관의 저 넓은 공간은 왜 필요했을까요? 저기에 선 사람들이 어떤 마음가짐이 들게끔 의도했을까요? 조선시대 해군들이 여기에서 사열같은 걸 했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기둥과 지붕 이외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가장 경건한 공간에서 옛 사람들이 느꼈던 감정이 궁금해집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해군 총사령부가 여수에서 통영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통영이라는 이름도 삼도수군통제사의 본영이 있는 곳이라 해서 통영이 되었다는 군요. 이경준이라는 통제사가 건물을 짓습니다. 이미 지어져 있던 여수의 진남관을 컨닝 쫌 합니다. 너무 똑같이 배끼면 들통나니까, 조금씩 다르게 짓습니다. 그래서 1604년 이 건물이 완성됩니다. 통제영의 중심건물인 세병관은, 이후로도 약 290년 동안 3도 수군을 총 지휘했고, 아직도 멀리 남해를 바라보며 당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지방관아 건물로서는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세병관은, 전쟁이 끝나고 평화를 기원하는 내용의 두보의 시 세병마 중 만하세병<은하수로 병기를 닦는다>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세병관이라는 이름도 그러하지만 현판 글자 하나의 크기가 2m에 달할 정도인 것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전쟁이 끝난 것을 기뻐하는 마음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세병의 출입문이 되는 ‘지과문(止戈門)’ 역시 ‘창을 거둔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23. 봉정사 대웅전 (국보 제 311호)

 

 

 

 

 

 

요즘은 가서 봐야 될 건물 뿐만 아니라 가는 길도 순위를 매기기도 합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탑10 머 이런건데요..... 경북 영주의 맨 꼭대기인 부석면에 남대리라는 동네가 나옵니다. 여기서 좀 더 가면 충청도와 강원도 그리고 경상도가 만나는 꼭지점이 나오는데요, 굽이 굽이 산등성이에, 가을이 되면 산등성이 마다 뽐내는 절경에.... 이 남대리에서 강원도 영월로 넘어가는 길, 제가 가 본 길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손 꼽을 만한 길입니다.

 

 

 

 

 

 

 

 

봉정사는 소박하면서도 단촐한 절집이기도 하거니와, 봉정사로 들어가는 길도 참 좋습니다. 나트막한 언덕의 시골길과 그 주위의 풍광을 보며 달리다 보면, 마음이 푸근해지면서... 참 우리나라에 태어나길 잘했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봉정사. 단촐한 절집이라고 만만하게 보면 큰 코 다칩니다. 국보가 2개, 보물이 4개나 있고, 절정의 풍광을 감상할 수 있는 만세루가 있고, 절안의 또 다른 절집 영산암이 있는 절입니다. 이 대웅전은, 극락전이 하도 유명해서 살짝 묻히긴 하는데요…. 봉정사의 중심은 이 대웅전이고 역시 국보 건물입니다. 3칸짜리 건물이구요 팔작지붕에 다포식입니다. 지붕을 옆에서 봤을 때 그냥 박공지붕 즉 사람 자면 맞배지붕이고 여덟 자면 팔작지붕이라고 합니다. 같은 3칸짜리이지만 맞배지붕에 주심포의 고려 때 건물인 옆 극락전과 이런 저런 비교를 하며 보는 것도 재미가 있을 겁니다. 저는 오히려 이 대웅전이 더욱 기품이 있어 보이고 눈길이 더 가는 건물입니다.

 

 

 

 

 

 

봉정사의 또 하나의 명품 만세루입니다. 유홍준 선생은 부석사 무량수전 앞의 악양루에서 바라보는 절경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라고 하셨는데, 봉정사 대웅전 앞의 이 만세루에서 바라보는 풍광도 만만치 않습니다.

 

 

 

 

 

24. 화암사 극락전 (국보 제 316호) 

 

 

"절을 두고 잘 늙었다고 함부로 입을 놀려도 혼나지 않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나라의 절치고 잘 늙지 않은 절이 없으니, 무슨 수로 절을 형용하겠는가. 심지어 잘 늙지 않으면 절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심사도 무의식의 한쪽에 풍경처럼 매달려 있는 까닭에 어쩔 수가 없다"

 

 

"잘 늙었다는 것은 비바람 속에서도 비뚤어지지 않고 꼿꼿하다는 뜻이며, 그 스스로 역사이거나 문화의 일부로서 지금도 당당히 늙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화암사가 그러하다. 어지간한 지도에는 그 존재를 드러내고 밝히기를 꺼리는, 그래서 나 혼자 가끔씩 펼쳐보고 싶은, 작지만 소중한 책 같은 절이다. 십여 년 전 쯤에 우연히 누군가 내게 귀속말로 일러주었다. 화암사 한번 가보라고, 숨어있는 절이라고, 가보면 틀림없이 반해게 될 것이라고......"

 

 

안도현 시인의 잘 늙은 절 화암사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산문도, 사천왕상도 없지만, 당당하게 늙은 절 화암사에 가면 숨어있는 국보 화암사 극락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촉나라 잔도를 연상케 하는 철다리를 건너 고개를 하나 돌면 '쨘~~~' 하고 화암사가 나온다. 먼저 반겨주는 건 고풍스럽고 따뜻하지만, 얼핏보면 기개같은 것도 보이는 우화루이다. 

 

 

 

 

 

 

그리고 우화루를 비껴 안쪽으로 들어가면 만날 수 있는 화암사 극락전. 단촐하다.

 

 

 

 

 

우리 건축의 아름다움에 꼭 들어가는 것 중 하나가 처마입니다. 뭐 우아한 곡선미를 뽐내는 처마… 머 이런 식입니다만….. 그럼 처마라는게 왜 생긴걸까요? 비 올 때 처마밑에서 애인이랑 뽀뽀하려고요? ㅎㅎ  우리 건물의 기둥은 나무로 되어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나무는 물에 아주 약합니다. 물을 먹으면 쉽게 썩지요…

 

 

그래서 처마의 가장 큰 역할은 기둥이 비를 피할 수 있게 해주는 겁니다. (서양건물은 처마라는게 거의 없습니다. 기둥이 돌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 뜨거운 햇볕을 어느 정도 가려주는 역할도 하고요,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처마를 앞쪽으로 많이 내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공포가 커지고 또 발달이 됩니다.

 

 

화암사 극락전은 우리나라 유일의 하앙식 구조인데요, 바깥에서 처마 무게를 받치는 부재를 하나 더 설치하여 지렛대의 원리로 일반 구조보다 처마를 훨씬 길게 내밀 수 있게 한 구조입니다. 자세히 보면 공포가 좀 다르게 생겼습니다. 머… 좀 전문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이런 거 몰라도 됩니다. 화암사의 고즈넉함과 극락전의 포근함을 진심으로 느낄 수만 있다면요….

 

 

 

 

 

 

요 용대가리 같이 생긴게 하앙이다. '3중 처마 시스템이다' 라는 주지스님의 설명이다. 보통 겹처마의 맨 바깥쪽에 있는 사각모양의 서까래를 '부연'이라 하고 그 안쪽에 있는 둥근 서까래를 그냥 '서까래'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화암사 극락전은 저 용대가리처럼 생긴 하항이 하나 더 있어서 3중 처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극락전 뒷쪽의 모습이다. 앞쪽이 용머리 모양의 하앙이었다면 뒷쪽은 심플하게 째삣한 삼각형 모양의 하앙이다.

 

 

 

 

 

 

화암사 주지스님과 담소중인 울 사모님. 주지스님은 '말하고지비'였다. 싫은 내색 하지 않으면 두세시간은 계속 말씀할 기세였다....ㅋㅋㅋ. 그리고 지겨워 죽으려하는 애들....ㅋㅋㅋ

 

 

 

 

 

 

국보 건물 24점을 간략하나마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몇번씩 가본 곳도 있고 아직 못가본 곳도 많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유홍준 선생님의 말씀이 다시 한번 생각납니다.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전통건축에 대한 지식도 정리가 되었구요 무엇보다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더 다듬어졌음을 느낍니다. 아이들과 함께 가봐야 할 곳이 생겨서 더 좋습니다.

 

 

네이버 마실님 정조실록님, 다음의 감악산님 구룡초부님 강무재님 모산재(존재의 따스함)님 금수강산님의 블로그와 까페, 연합뉴스 영남일보 데일리터마로우, 네이버 이용재의 인문학적 집짓기, 독서같은 여행 비니버미님의 블로그, 엔하위키, 위키백과, 두산백과 그리고 문화재청에서 사진과 글을 옮기고 참고하였습니다.

 

 

자료를 찾느라 인터넷을 돌아다녀보니 참 대단합니다. 무협지에 변방의 혈교무리들이 강호를 이야기 할 때 엄청난 내공의 숨은 고수들이 득실거린다고 했는데 바로 여기가 그렇습니다. 홈페이지의 내용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그런 고수들이 정말 득실거립니다. 저도 언젠가는 그런 고수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을까요? 이럴 땐 정말 추혼십육절 같은 절정무공 비급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단박에 고수가 되는 그런 쓸데없는 상상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