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내 인생의 만화책
어느 날 집에 와 보니, 집에 있던 만화가 줄었습니다. 쌓여 있던 만화책을 보다 못한 울 마눌이 고이 묶어서 집 앞에 버렸댑니다. 이런~~~ 사라진 만화에는 애지중지 하던 시티헌터 전권도 있었습니다. 그걸 구하려고 헌책방을 얼마나 뛰어나녔는데. 한바탕 난리가 났습니다. 그 뒤로 나도 느낀 바가 있어, 헌책방에서 만화책 사오는 건 이제 안합니다.
오늘 주제는 만화입니다. 이 기회에 내 인생의 만화책을 꼽아봅니다. 아아~~ 그 많은 만화를 어떻게 꼽지? 괜시리 미안해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왕 맘 먹었으니 함 해볼랍니다.
우라사와 나오키 <마스터 키튼>
내 인생의 롤 모델입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용기를 내어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이루어 질 것이라는 평범하지만 쉽지 않은 명제가 참이라는 걸 주인공 키튼이 보여줍니다. 내가 꿈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 나의 영어 이름이 Keaton인 이유입니다.
허영만 <오, 한강>
해방 직후부터 한국 전쟁을 거쳐 87년 629선언까지,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그렸습니다. 우리의 현대사를 그린 만화 중에서 이만큼 임팩트있는 만화는 단언컨대 없습니다. 20대 초반에 읽었더랬는데, 그 감동과 충격은 아직도 엊그제 같이 생생합니다. 87년도에 이 책이 발행되었는데, 그 서슬이 퍼른 시절에 어떻게 이런 만화가 나왔을까 하는 거대담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죽산 조봉암 선생을 처음 알게 된 것도 이 책이었습니다.
고우영 <삼국지>
우리가 알고 있던 삼국지와는 전혀 다른 해석입니다. 예를 들자면 공명과 관우의 관계를 2인자를 차지하기 위한 라이벌로 묘사한다던가 조조를 시대의 개혁가로 설정했습니다. 심지어 UFO와 외계인도 나옵니다. 그리고 그 엉성한듯 살벌한 그림체는 한번 빠져들면 결코 헤어나지 못할 고우영 화백만의 매력입니다. 이문열의 삼국지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 시대의 명작입니다.
이케가미 료이치 <키즈오이비토 : 상처를 쫓는 자>
중학생 시절에 담배 연기 자욱한 만화방에서 발견한 일본 해적판 만화의 본좌입니다. 주인공 남자는 거울에서 튀어 나올 것 같은 비주얼에 여자는 말할 것도 없구요. 사실감 넘치는 하드보일드 액션과 지금봐도 꼴리는 19금의 가감없는 장면들까지.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만화였습니다. 10대 소년에게 얼마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지는 뭐..... 그 소년은 자라 오로지 만화를 보기 위해 일본에 갔고, 급기야 이 일본의 뒷골목을 뒤져 이 만화들을 원본으로 다 사버립니다.
박시백 <조선왕조실록>
잘 나가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오직 이 조선왕조실록에 매달려 13년의 세월을 보냅니다. 그리고 이 만화가 탄생했습니다. 박시백 화백의 인간 승리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장면이 바로 위의 그림에서 나오는 소현세자 이야기입니다. 그 시절의 제대로 된 진보주의자 소현이 왕이 되었더라면 아마 우리의 역사가 송두리째 바뀌었을 겁니다. 그걸 막은게 초 병신왕 인조였습니다. 이런 만화는 널리 홍보해서 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할 책입니다.
이노우에 타케히코 <슬램덩크>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만화입니다. 성장 만화이면서 폭력 만화이자 한 편의 드라마이면서 스포츠 만화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극한의 완성미를 보여줍니다. 일본에서 알바를 하며 이 만화로 인해 저의 일본어 삼할이 완성된 작품입니다. 얼마 전, 중학교 농구의 시 대표로 뽑혀 도 대회에서 급기야 우승을 하여 전국대회 출전권을 따낸 아들래미와 이 만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서너시간은 금방 가버립니다. 부자지간의 아주 중요한 대화의 매개체이기도 합니다.
문정후 <용비불패>
무협이라는 장르는, 그러니까 남자의 로망입니다. 주인공의 역경과 기연이 교차하는 성장 스토리에다 그를 지지하는 매력적인 여성이 나오고 일신을 희생해서 대의를 쟁취하는 남자들의 보편적인 낭만을 가장 잘 집대성한 장르지요. 용비불패는 한국 무협만화의 단연 본좌입니다. 주인공 뿐만 아니라 주연급 조연들의 간지 콸콸 흐르는 캐릭터에,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과 그 속에서 강호라는 넓디 넓은 바다에서 진정한 고수를 만나 일합을 겨루는..... 아~~ 남자는 어른이 되어도 그 로망 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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